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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그때의 나는 지독히 시에 매달리던 문학지망생이었다. 고시공부를 위해 가까운 친구가 책을 싸들고 절간으로 같이 가자고 잡아당길 때에 "넌 판·검사가 좋겠지만 나는 오직 시인이 되고 싶다" 면서 굳이 고집을 부리던 일이 어제일 같이 느껴지곤 한다.


 박목월 시인은 그때 이미 스승으로 정한지가 10년이 지났어도 시인으로 내놓을 생각을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현명한 농부는 설익은 과일을 수확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스승이 원망스러워 지고 허락을 받게 될 날이 지겨워질 무렵인 1967년, 늦가을께 였다. 선생님이 직접 전화를 하시면서 "서울에서 시인들이 한 판 잔치를 벌이니까 왔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서둘러 날짜에 맞춰 서울에 가서 전화를 드리고 시민회관(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만나게 되었다. 시민회관에는 '시인만세'란 이름으로 행사가 있음을 알리는 선전광고가 여기저기 붙어있고 이른 시간인데도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시인만세라니? 춥고 배고픈 시인들이 무슨 만세를 어떻게 부른단 말인가? 그러나 나의 생각은 '아니올시다'였다. 행사가 시작되고 나서 뜻밖에 모여든 사람들로 모두가 놀라는 광경이 벌어지고 말았다. 한국일보사가 발간하는 주간한국 주최로 우리나라 신시(新詩)가 되는 최남선의 '해(海)에서 소년에게' 란 시가 발표 된지 60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여 갖게 된 시인들의 첫 잔치였다.


 시인이 관객을 모을 수 있을까? 한 우려를 불식하고 시민회관의 2,000석을 메우고 나서도 입장하지 못한 사람들이 옥외에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주최측에서 옥외에다 스피커를 달아 그들에게 들려주게 되었다. 한국최초의 시인들이 꾸민 잔치는 분명 만세를 부르고도 남을 정도로 성공적인 행사였다. 그도 그럴것이 이 날의 공연에는 박종화, 이은상을 비롯하여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등 우리나라 1세대 문인들이 무대에 올라가 자작시를 낭독하고, 영화배우 최은희, 김승호 등 라디오의 인기 성우들이 명시를 낭독하여 처음으로 무용시를 선뵘으로서 '시인만세' 행사는 감동적인 행사가 될 수 있었다. 시인만세 행사는 시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갖게 해 주어서 뒤에 우리나라에서도 '시의 날'을 제정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난 11월 1일은 '시의 날'이었다. 시를 쓰는 시인이 사회를 개조하는데 기능을 가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쓴 시가 사랑받으면서 낭송되고 노래로 불린다면 그러한 사회는 우리가 갈망하는 선진화, 민주화 그리고 삶의 질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하는 일이 될 것이다. 나와 울산의 시인(문인)들은 그와 같은 공통된 생각으로 글을 쓰고 있지만 어쩐지 그때 스승과 함께 '시인만세'를 보면서 열광했던 시인의 마음이 아닌 것 같다. 나는 그 후 한 달이 지난 1968년 신년벽두에 비로소 천을 맡아 문단 말미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그러나 마음은 늘 허전함을 느낀다.
 1960년대의 나는 모두가 가난했던 환경에서 그야말로 문화의 불모지인 울산에서 시를 쓰랴 문인협회를 만들랴, 예총을 결성하랴 뛰어다니는 중에도 고독을 삭이면서 문우들끼리 정다운 인간미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의 시인은 다섯 손가락을 셀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가 낯선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쓸쓸한 문우들이 되고 있다. 세상이 삭막해진 탓으로 돌려버리기에는 그 이유를 씻어버리지도 못할 것 같다. 글을 쓰는 일 보다 감투에만 신경을 쏟다 보니 그런 것이 아닐까? 시인(문인)은 자신이 쓴 글이 말해준다. 빼어난 시를 골라 게재하고 있는 10월 10일자 조선일보에 울산의 시가 실렸다. 신춘희 시인이 쓴 태화강 하구에서 란 시였다. 명시였다. 이른 아침 나는 그 시를 보면서 어찌나 자랑스럽고 고마운 마음이 들고 내가 지난날 시에 매달리던 생각을 회상하며 곧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는 신춘희 시인은 시가 신문에 실린걸 모르고 있었다. 문단선배로써 나는 그에게 아무런 힘을 보태지 않았어도 그는 이미 훌륭한 시인이 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는 묵묵히 시를 쓰며 고독하고 외로운 길을 잘 걸어가고 있다! 그것이 나를 순간적으로 울컥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가 말했다. "선생님, 우시는 겁니까?" 나는 얼른 폰을 닫아버리고 생각에 잠겼다. 후배 문인들이 신춘희 시인을 닮아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었다. 그렇다. 시인(문인)은 자기와의 고독한 싸움을 넘으며 묵묵히 좋은 시를 쓰는데서 자신을 빛내게 된다. 단체나 감투가 해주는 게 아니다. 또 신문에 값싸게 실리는 작품의 선자가 된다고 해서 자랑할 일이 아니다.
 그래서 시인(문인)은 자신의 글이 말해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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