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랑이 그 빛깔을 조금씩 달리한 것이 모든 인간관계다. 많이 달리한 것이 곧 증오다. 우리는 늘 이 사랑과 증오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오늘도 살고 있다.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이 영원한 주제는 오늘도 조금씩 색깔을 달리하는 가운데 인간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그래서 인간은 갈등하며 변화하고 발전해 가는 존재다. 사랑의 가장 고유한 명제는 희생이고 그 희생 중에 자신의 피를 흘려가며 누군가를 살리는 행위를 하는 것만큼 더 고귀한 일은 없을 것이다. 오늘날 얼굴 한번 본 적조차 없는 그 누군가를 위해 피를 흘려 값없이 희생하는 행위가 바로 헌혈이다.
 

 필자가 찾은 삼산 헌혈의 집은 입구를 들어 서자마자 산뜻하고 아늑함을 주었다. 이 알 수 없는 아늑함은 마치 모태 속에 들어 와있는 것 같은 평안함을 주었다. 깨끗한 시설과 헌혈자들의 편의를 배려해 만든 곳곳의 시스템들은 자발적으로 헌혈에 참여한 이들에게 신뢰감을 주었다. 또한 채혈전 전자 문진과 담당 직원과의 상담을 통한 헌혈자 현재의 건강 상태를 꼼꼼히 체크해주는 과정들은 헌혈자들에게 또다른 자존감을 높여 주는 듯해 기분이 참 좋았다. 드문 드문 앉아서 순 번을 기다리는 헌혈자들을 보니 흐뭇한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울산의 삼산은 사실 오래전 일제시대때 일본인들이 비행장 건립을 위해 세 개의 산을 없애버리고 만든 땅이다. 당시 우리 울산민들을 노역장으로 끌고가 고된 노동을 시키며 만든 지금의 땅이다.
 울산이 광역시로 승격된 지난 1997년에 삼산을 개발하기 시작해 지금의 눈부신 신시가지로 탈바꿈을 하게 된 것이다. 어두운 역사를 뒤로하고 유명 호텔과 백화점들이 들어선 그 땅위에 삼산 헌혈의 집은 우뚝 서있다. 많은 남녀 노소들이 총총히 연인들에게 줄 꽃을 사 지나가고 유명 프렌차이즈의 빵을 파는 곳도 손님들로 북적이고 옷집, 유흥가 등등이 밀집한 신시가지 삼산은 낮과 밤 구분없이 화려하고 활기차다. 하지만 도시민들 중에 우울증 환자들이 늘어 가고 있다는 뉴스 보도를 접할땐 참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삼산 헌혈의 집이 이 번잡한 도심 한가운데 위치 하고 있는 이유가 뭘까?
 

 사랑과 증오는 전이성이 아주 강렬하다. 사랑은 또다른 사랑을 낳게 되지만 반대로 증오는 증오만을 낳게 될 뿐이다. 요즘의 우리 세태는 원인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사회 병리 현상들에 주눅 들어 있고 쉬쉬하며 눈치 꾸러기가 돼 가고 있는 것만 같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리도 소신이 없는 사회가 됐을까? 서로 헐뜯는 뒷담화가 난무하고 사랑과 관용은 메말라 허덕이는 현대인들은 삼산 헌혈의 집을 찾아 보는 건 어떨까? 우울증마저 사라지게 해 줄 것이다. 사랑은 내가 타인을 위해 무엇인가의 의미가 되어 줄 때 샘솟는 기쁨이다. 증오는 반대로 내 자신의 이기적인 욕구는 고집스레 천착하며 타인은 용서치 않으려는 마음이다. 우리에게 놓인 이 사랑과 증오 중에 무엇을 선택할지는 우리의 자유 의지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선택해야함이 옳을까?
 

 '헌혈로 사랑을 전하세요!' 헌혈의 집 입구에 쓰여져 있는 글귀다. 모든 생명의 근원이 피에서 비롯되고 생성되는 것이고 보면 헌혈 행위는 고귀하다. 희생을 통한 관용과 사랑의 실천이 부족한 이 세태에 헌혈의 행위만큼 더 숭고한 일이 또 있을까 싶다. 이 세상 위에는 오직 사랑과 죽음만이 온전히 우리에게 허락되어져 있다. 그러고 보면 헌혈 행위야말로 우리가 이 세상 사는 동안 나누어 주고 갈 수 있는 사랑의 실천이라는 믿음이 든다. 사랑은 증오보다 더 붉고 더 강한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 헌혈은 작은 실천이지만 큰 사랑이다. 산과 거리의 가로수들과 곳곳마다 붉은 단풍이 들어 가슴 설레고 누구에게든 사랑한다라고 말하고픈 아름다운 계절이다. 이 풍성한 계절 가을에 우리 모두 삼산 헌혈의 집을 찾아 값없이 주는 헌혈로 사랑을 전하는 울산 시민이 되어 주길 소망한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