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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 강팍하다 보니 때때로 '동화 속' 같은 세상을 꿈꾸게 된다. '동화 속의 공주처럼 사랑이 오나 봐. 오늘만은 유리 구두 꼭 맞을 것 같아'라는 노래가사처럼 '동화 같다'라는 말에는 만화나 영화 같다 라는 말보다 순수하고 낭만적인 환상이 느껴진다. 아마 동화가 동심을 지닌 아이들을 위한 문학이고, 대부분의 전래동화가 행복하게 끝나기 때문일 것이다. 아궁이 앞에서 재투성이로 지내던 신데렐라는 멋진 왕자와 결혼한다. 개구리를 벽에 던져 버린 까칠한 공주도 왕자와 결혼한다.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금기를 어긴 잠자는 숲 속의 공주도 용감한 왕자와 결혼해 모두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행복에 대한 우리의 염원이 어찌나 강한지 '옛날 옛적에'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는 등과 배처럼 항상 세트로 함께 등장한다.

 

하지만 주인공의 행복과 달리 주인공을 괴롭히던 인물은 불구덩이 속으로 쳐 넣어지거나, 불타는 신발을 신고 죽을 때까지 춤을 추거나, 발뒤꿈치가 잘리는 등, 악에 대한 응징은 매우 끔찍하고 잔인하다. 동화 속의 안티고니스트에 대한 잔인한 응징이 아이들에게 겁을 주어 그러한 행동을 막으려는 일종의 경고 장치이고, 그마저도 나중엔 순화되고 각색되어 초기의 끔찍함이 많이 사라졌다지만 여전히 결말의 징벌은 자못 준엄하다. 권선징악과 해피 앤딩의 오래된 관습. 동화가 현세의 행복을 염원하는 민중의 바람이라는 것을 안 것은 나중의 일이다. (그러니까 현실 속의 민중은 왕자와 결혼하는 공주가 아니라 불속에 밀어 넣어지는 마녀이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민중은 그저 너울대는 불 속에서 환상처럼 분홍빛 레이스와 보석이 찬란하게 박힌 드레스를 볼 뿐이다.)

 

반면 우화는 어떤가. 우화는 대개 실패나 응징을 통해 '하지 마라'는 교훈을 준다. 우유가 달걀로, 다시 닭으로, 돼지로, 젖소로 변하다 그만 쨍그랑, 우유병이 깨지는 허망함. 이처럼 허황된 꿈은 꾸지 마라. 개처럼 꼬리를 흔들며 사랑받고 싶어 하는 당나귀에 대한 가혹한 채찍질. 분수에 어긋나는 행동은 하지 마라. 물에 비친 그림자를 향해 컹컹 짖다 작은 고기 조각마저 놓치고 마는 어리석음. 욕심 부리지 마라. 이솝 우화나, 라 퐁텐의 우화를 다시 읽으니 어렸을 때는 그저 재미있던 것이 지금은 교훈과 금기(그것도 우리 같은 소시민을 향한)에 대한 묘한 반발로 복잡한 심정이 된다. 마침 류인서 시인의 '썩은 사과 한 자루'란 시를 보니 나와 비슷하게 우화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 다소 길지만 그 시의 일부분을 인용해 보기로 한다.

 

'이야기의 시작이야 당연히 한 마리의 잘생긴 망아지였죠…/ 망아지와 맞바꾼 살찐 암송아지였죠…/ 알고 본즉 뿔도 안 난 어린 양이었죠…/ 뒤뚱뒤뚱 알 잘 낳는 새하얀 거위였죠 암탉이었죠 / 사실인즉, 암탉과 자리 바꾼 썩은 사과 한 자루였죠… 당신의 발치에 힘없이 널브러진 쭈그렁 빈 사과자루가 전부였죠// 어린 시절 책에서 배운 안델센이죠 썩은 사과 한 자루죠/ 망아지인가 하면 송아지 송아지인가 하면 양이죠 양인가 하면 거위죠 암탉이죠 바뀌고 또 바뀌는, 작아지고 또 작아지는 농부할아버지의 이야기/ 과장 없는 삶의 은유란 걸 오늘에야 겨우 눈치 챈 거죠' 망아지가 송아지로, 다시 양으로, 거위로, 암탉으로, 마침내 썩은 사과 한 자루로 변해가도 그저 '참 잘했어요'를 외치는 아내. 어릴 때 우리는 이 우화 같은 동화 속에서 순종하는 아내와 빛나는 부부애를 보았다.(물론 내기에서 이긴 농부는 망아지 값보다 훨씬 많은 금화를 한 자루 받는다. 오오, 해피 앤딩!) 그러나 지금은 매 맞는 아내나 스톡홀름 증후군 같은 길들여짐을 본다. 아내는 왜 남편의 어리석은 결정에 제동을 걸지 못하고, 당신이 옳아요. 당신이 최고야 만을 외칠까. 그런데 더 나아가, 늠름한 망아지가 결국 썩은 사과 한 자루로 널브러지는 그것이 '과장 없이 빛나는 삶의' 모습이라니. 삶에게 먼저 말을 걸 수 없어서 따라쟁이처럼 따라하다 점점 쪼그라들어 목소리만 남은 에코처럼. 텅 빈 공허가 우리의 모습이라니. 이 가혹함. 어른이 된다는 것은 동화에 드리워진 분홍빛 커튼을 들추어보고 동화의 맨얼굴, 그러니까 우화를 발견하는 과정이 아닌지.

 

그리고 우리는 이제 삶의 벌거벗겨진 실체를 교묘히 가린, 그러나 기실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그 금기와 교훈의 우화, 너희는 그렇게 살아. 꿈꾸지 말고, 욕심 부리지 말고, 분수에 어긋나지 않게 살라고 속삭이는 우화에 반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마침 라 퐁텐은 우리의 이러한 '멘붕'을 위해 위대한 우화를 남겨두었다. 농부가 호박을 보면서 생각했다. '신은 왜 이런 연약한 줄기에 이렇게 큰 호박을 달아 줬을까? 그리고 왜 굵은 상수리나무에는 보잘 것 없는 도토리를 주셨을까?' 며칠 뒤 농부가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낮잠을 자는데 무언가 이마에 떨어져 잠이 깼다. 도토리였다. 순간 농부는 큰 깨달음을 얻는다. '휴, 호박이면 어쩔 뻔했을까?' 그렇다. 불평과 감사는 종이 한 장 차이다. 그리고 이 또한 우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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