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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1학년 때 내가 다닌 상북 중학교에서는 봄 소풍을 석남사로 갔다. 반질반질한 까만콩 같았던 우리는 가지산 발등께에 흩어져 재재거리며 놀았다.

 백일장은 점심을 먹어도 좋다는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시작되었다. 나는 난생 처음 시라는 걸 써보기로 했다.

 도시락을 다 까먹고 사이다와 과자, 계란까지 다 먹고 늙은 나무뿌리 위에 앉아 시를 썼다. 계곡에서는 차가운 구슬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4월이었지만 춥고 석남사의 봄은 더디게 오고 있었다. 대략 그런 내용의 시를 긁적였던 것 같다.

 소풍이 끝날 무렵 백일장 결과가 나왔다. 장원으로 내 이름이 불렸다. 너무 놀랍고 부끄러운 나머지 막 걸음마를 배운 아기처럼 엉거주춤 걸어 나가 상을 받았다. 부상은 손에 다 쥐지도 못할 만큼 많은 공책이었다.

 빈 가방에 공책을 넣자 가방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내가 만약 풍선이었다면 나는 진작 터지고 말았을 것이다.

 받아온 공책은 언니들에게 나눠주었다. 이미 학교를 졸업한  큰언니에게는 두 권을 주고, 아버지와 엄마께도 한 권씩 돌렸다. 아버지께서 연필 끝에 침을 묻혀 공책 겉장에 내 이름을 꾹꾹 눌러 써놓던 기억이 난다.

 그 날 밤 내가 무슨 생각을 했고, 어떻게 잠들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 날의 감동과 놀라움은 작가가 된 지금도 차마 비유를 못하겠다. 

 글 쓰는 재주가 있다고 사회 선생님이 말씀해 주셨지만 학창 시절 나는 시시껄렁한 글쓰기에 목숨을 걸었던 것 같다. 위문편지에, 라디오 진행자에게 보내는 팬레터에, 크리스마스 카드에, 좋아한 남학생에게 보내는 연애편지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살면서 그보다 더 가슴 벅찬 순간들이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는 동안 감사와 희열의 두께가 얇아지고 가끔 잊고 살기도 한다.

 그런데도 30년 전 석남사 그 뜰에 비춰든 햇살은 이상하게도 식지 않는다. 돌이켜 보면 그 날 가방에 담아온 것은 공책 열권이었으나, 내 마음에 담아온 것은 한 그루 나무였는지도 모르겠다. 글을 움 틔우기 시작한 4월의 어린 나무 한 그루가 가슴 속에서 자라기 시작한 순간이었으니.

 계절이 바뀔 때마다 석남사에 간다. 혼자서도 가고 여럿이 손잡고 가기도 한다. 나의 다정한 한 지인은 석남사에 같이 가줄까 먼저 전화를 걸어오기도 한다. 그 곳은 석남사 부처님이 계신 대웅전이 보이지도 않는 낮은 곳. 고맙게도 낙엽의 자리. 바람의 자리. 물소리의 자리. 그리고 추억의 자리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 

 늙은 나무들의 행렬을 기웃거리며 그곳에 가면 반들거리는 언니의 교복을 물려 입은 단발머리의 내가 깡총거리고 있다. 

 욕심이라곤 없던, 걱정이라곤 없던, 미움이라곤 없던 어릴 적 아이가 말없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준 다음부터 자주 그 곳이 그리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그 아이가 그리운 것인지 그 때가 그리운 것인지 모르겠지만, 가장 순수하고 가장 착하고 건강한 그 소녀를 만나기 위해 그 곳으로 가는 것이다. 

 억울하고 아팠던 이야기 몇 개를 꺼내놓고 앉아 있으면 젖은 눈을 훅 불어주는 아이가 있다. 어느새 나의 메마른 나무에 물이 오른다.

 석남사에 가고 싶다. 갈 때가 되었다. 
 나의 순수. 나만의 햇살 가득한 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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