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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에 온지 벌써 20여년이 훌쩍 지났다. 작은 트럭에 이삿짐을 싣고 태화다리를 건널 때는 겨울이었다. 강물은 뿌옇고, 검은 기름띠가 버짐처럼 번져있었다.

 처음엔 복산동 남운 럭키 아파트  뒤편 언덕배기 이층에서 살았는데 윗풍이 심한 집이라 얼마 안 되어 지금의 홈 플러스 근처 주택으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쯤엔 다시 남운 럭키 아파트로 이사했으니, 지금 살고 있는 신정동으로 오기 전까지 주로 복산동과 반구동 일대에서 살았던 셈이다.

 지금은 삼성 래미안 아파트가 들어서 옛 모습을 짐작하기 어렵지만, 당시 남운 럭키 맞은편에 있는 약사초등학교 뒤편에는 한국비료 회사의 사택, 그러니까 한비사택이 있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한비사택에 자주 놀러갔는데, 조용하고 아름다운 곳으로 기억된다.

 입구에 들어서면 넓은 잔디밭이 있고, 잔디밭을 지나면 길 양 옆으로 벚나무 가로수가 이어졌다. 조금 더 가면 사택 건물이 줄지어 서있는데, 사택의 모양은 대개 작은 단층집에 생울타리를 두르고, 울타리 안에 있는 좁은 뜰에는 자주달개비, 사철채송화, 봉숭아 같은 키 작은 꽃들이 피어 있곤 했다. 빨랫줄에 하얀 기저귀가 걸리고, 장난감 말이나 플라스틱 모종삽 같은 소꿉놀이가 흩어져 있다면 사택의 풍경이 완성된다.

 하지만 한비사택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바로 벚꽃에 있었다. 가로수길 뿐 아니라 단지 곳곳에 오래 된 벚나무들이 있어, 봄이 되면 연분홍 벚꽃이 구름처럼, 안개처럼 자욱하게 피어 보기만 해도 황홀했던 것이다.

 아이들이 입학한 다음부터 한 삼 년 동안 동여자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남운 럭키에서 학교를 가려면 한비사택을 가로질러야한다. 한비사택은 사계절이 모두 아름답지만 특히 봄의 사택 풍경은 장관이다. 자욱한 벚꽃이 꽃터널을 이루며 피었다가, 가벼운 바람결에도 난분분 난분분 떨어진다. 따뜻한 함박눈. 조용한 눈보라. 벚꽃이 지는 모습을 이렇게 표현해보면 어떨까? 벚나무 그늘을 지나오면 머리와 어깨에 눈송이처럼, 흰나비처럼 꽃잎이 내려앉는다. 박목월 시인은 '사월의 노래'에서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구름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하였지만, 그 목련꽃이나 구름꽃을 '벚꽃'으로 바꿔보아도 아무 손색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가을이 되면 벚나무는 붉게 물들어 어깨와 발등을 살짝살짝 건드리며 포도에 내려 쌓이는 것이다.

 한비사택과 함께 기억나는 곳은 함월산에 있는 작은 개울이다. 봄이 되면 아이들과 함께 함월산에 쑥을 뜯으러 다녔다. 산 아래쪽에 논과 밭이 있어 쑥이 많이 났다. 쑥을 뜯으며 산길을 따라 조금 더 들어가면 작은 개울이 나오는데, 아이들은 그 개울을 아주 좋아하였다. 풀잎과 종이배를 띄우고, 물고기나 다슬기가 있는지 돌 밑을 뒤지며 한참을 노는 것이다. 개울물 소리는 맑고 경쾌했다. 나는 바위에 걸터앉아 음악 같이 쏟아지는 물소리를 들으며, 마른 대궁 끝에 앉아 있는 물잠자리가 하마 언제 날아갈까 가만히 바라보곤 했다.

 한비사택 근처에서 산지 칠 년 쯤 지난 1997년, 우리는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하며 그곳을 떠나게 되었다. 나중에 사택이 헐리고 래미안 아파트가 들어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정말 아쉬웠다. 그 아름드리 벚나무들, 황홀하게 피던 벚꽃들, 윤기 흐르던 생울타리, 한낮에 햇살이 눈부시게 튀던 작은 돌들이 깔린 포도, 조용하고 낮은 집들, 그런 것들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니, 그곳에서 꽃 이름을 가르치고 쑥을 뜯으며 아이들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정말 기억으로만 존재하게 되다니 하는 아쉬움. 더구나 한비사택 맞은편의 다른 사택도 헐리고 대형 마트인 홈 플러스가 들어섰다. 사방으로 도로가 시원스레 뚫리고 차들이 끊임없이 질주한다. 이젠 어디에도 벚나무의 흔적은 없다. 그리고 혁신도시 개발로 함월산의 개울도 사라졌다. 버지니아 리 버튼의 '작은집 이야기'란 그림책에 개발로 인해 빌딩에 둘러싸이게 된 작은집을 시골 언덕으로 옮기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처럼 한비사택도 어딘가로 옮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긴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 해마다 피는 꽃도 지난해의 꽃이 아니고, 조잘대며 흐르는 물도 어제의 물이 아니다. 기름띠가 번지던 강물은 이제 맑아져서 여름엔 수영대회가 열린다. 고사리 손으로 쑥을 뜯어 나물 봉지에 보태고, 풀잎 배를 띄우던 아이들도 다 자라 이십대가 되었다. 그래도 가끔 홈플러스 쪽을 지날 때면 마음속에 풍경이 하나 둘 떠오르는 것이다. 자욱이 꽃이 핀 벚나무 가로수 길과, 낮은 생울타리 안에 장난감 목마가 있고 그 목마의 등 위로 조용히 햇살과 벚꽃이 내려앉는 모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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