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간은 두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눈은 세상과 인간을 보는 시선이다. 세상과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는 삶을 이해하는 중요한 척도이기도하다. 최근 일어나고 있는 세간의 뉴스를 보면서 시선에 대한 사유를 하지 않을수 없다.


 신화에는 한 개의 눈을 가진 폴리페모스(키클롭스 거인)의 이야기가 있다. 이마 한 가운데에 하나의 눈을 가진 거인인 폴리페모스(키클롭스 거인)는 어느날, 바다의 요정 '갈라테리아'의 모습을 보고 짝사랑에 빠진다.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긴 그는 해변가에서 두연인의 다정한 모습에 이성을 잃고 발작적인 광기로 바위를 들어 그녀의 애인 '아키스'를 죽이고 만다. 하지만 그에게는 죄책감같은 것은 없었다. 하나밖에 없는 그의 외눈은 오직은 그녀만을 보았기 때문이다. 하나의 눈은 자신과 상대의 거리를 가늠하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상대에 대한 개념과 자기 성찰도 어려웠다. 죽은자에 대한 가책도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배려도 찾아볼수 없다. 하나밖에 없는 눈이 '갈라테리아'에 멀고 말았으니, 그의 가슴에 품은 사랑은 위험할 수 밖에 없다. 오로지 자신의 욕망밖에 없는 사랑은 비극인 것이다. 훗날, 폴리페모스는 가지고 있던 하나의 눈마저 오이디세우스에게 빼앗기고 만다.


 프랑스의 상징주의 화가 오딜롱 르동(1840~1916)의 '카크롭스'에서 인상주의가 풍미하던 시대에 몽상과 신비의 세계를 찾아 나선 고독한 예술가의 모습, 혹은 우리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화가이면서 시인, 음악가였던 그는 자유로운 환영의 회화를 통해 내면에 귀를 기울이며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펼쳤다. 그의 대표작 '감은 눈'에서와 같이 내면의 시선, 일상의 눈으로는 보지 못하는 것들을 눈을 감아 버림으로써 새롭게 떠올리고, 또한 복잡한 일상도 질끈 감은 눈으로 한 순간 잊을 수 있으며, 지난 한 일상의 실타래 속에서 잠시 그림 속 여인처럼 눈을 감고 싶어지게 가시적인 세계의 논리를 통해 비가시적인 것을 펼치고자 하였던 르동의 예술관이 사뭇 경외하다.

 

▲ 오딜롱 드롱 作 '키클롭스'. 오테를로 크뢸러뭘러 국립박물관소장(네덜란드)(1914)


 폴리페모스의 이야기는 대극적인 가치를 두루 볼수있는 균형의 눈을 가지라고 말하고 있다.
 '두 개의 눈과 두 개의 귀 그리고 하나의 입'은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자기경영을 위한 마법같은 숫자다. 자기경영은 두 개의 시선이며, 이 시대는 시선에 대한 사유로 '시선경영'을 요구하는 것이다. 내면을 향한 시선을 잃어 버리면 그 눈은 더 이상 자신의 삶을 밝히는 등불이 될 수 없는 법이다. 시선경영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자신에 대해 절대 눈을 감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100개의 눈을 가진 아르고의 이야기처럼 보지못하는 것이 없다하더라도 자신을 들여다보는 성찰의 눈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자신이 누구인지 알수없으며, 세상에서 자신만이 할수 있는 일을 찾아내기 어려울 것이다. 외눈과 100개의 눈은 불균형을 다스리는 '통섭의 눈'이 아니였을까? 갈등과 불협화음을 통섭하여 이뤄낸 조화로운 아름다움으로 꽃보다 진한 향기 품은 기쁨의 새해를 맞이하자.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