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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가 처음 우리 앞집으로 온 것은 내가 초등학교 때였다. 여남은 살쯤 되었을까. 아이는 혼자서 우물가 느티나무 밑에 앉아 공깃돌 놀이를 하다가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며 집으로 돌아갔다. 해맑은 눈동자에 윤기 나는 단발머리, 오동통한 얼굴에 볼우물이 파여서 더 귀여운 인형 같은 아이는 가끔 누군가를 기다리듯 먼 데를 하염없이 바라보기도 했다. 그가 놀다 간 빈자리에는 왠지 알 수 없는 쓸쓸함이 한참이나 머물렀다.

 이름이 덕이라고 했다. 그는 앞집 안동댁 아주머니의 친정조카로 앞으로 같이 살게 될 거라고 엄마가 일러주었다. 친구나 다름없으니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안동댁은 6·25사변 난리 통에 남편을 잃고 슬하에 오 남매를 거두고 지내는 빈농의 처지였다. 남의 집 농사일을 거든 대가로 받은 양식으로 근근이 입에 풀칠만 하는 형편이었다. 어른들은 위로 딸 셋은 안동댁이 직접 배 아파 낳은 자식이 아니라고도 했다.

 근자에 들어 친정 남동생이 폐병으로 세상을 등지고 그 후유증으로 젊은 올케마저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사달이 났으니 얼마나 눈앞이 캄캄했겠는가. 당신 코가 석 자건만, 불쌍한 조카를 차마 못 본체 내칠 수가 없었던 안동댁. 그렇게 덕이는 군식구였다.

 이런 사정으로 보아 덕이는 끼니마다 눈칫밥 아닌 눈칫밥 신세였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거기다가 무슨 연유인지, 고만고만한 시댁 쪽 객식구가 심심찮게 들러 며칠씩 묵고 갔으니, 내 어린 눈에도 앞집은 마치 '어린이 보호소' 같아 보였다고나 할까. 이런 사정은 동네 우물가나 빨래터를 통해 습자지에 물 번지듯 해서, 모르는 사람이 드물었다.

 그런 날을 그럭저럭 지내는가 싶더니 결국 아이들 울음소리가 담장을 넘었다. 식구가 여럿이라 그러려니 했는데, 날이 갈수록 그 소리가 심상찮았다. 어떤 날은 매질 소리에 고함까지 더해져서 담장 안이 쩌렁쩌렁했으니 말이다. 그럴 때마다 우물가 느티나무 밑으로 쫓겨 나와 남몰래 가는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는 덕이를 만났다. 내가 다가갈라치면 마른 손등으로 퉁퉁 부은 눈두덩을 스윽 훔치며 애써 희미하게 웃던 덕이의 양 볼에 푹 폐인 보조개는 더 슬퍼 보였다. 그럴때 마다 영락없이 그의 이마에 시퍼런 혹이 부어올라있어서 마음이 아렸다. 그래도 내가 해 줄 수 있는 거라곤 방금 쇠죽솥에 찐 피 감자를 식혀 그의 손안에 쥐여 주는 것이 다였다. 애써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그 아이가 오래 머물지 못할 거라고 수군거렸다. 엄마는 더러더러 덕이를 부엌으로 불러 누룽지를 입에 넣어주거나 우리형제가 걸치던 옷가지를 대신 입혀서 돌려보냈다.

 어느 가을날, 벼가 누렇게 익은 논길을 가르며 승용차 한 대가 동네로 들어왔다. 덕이는 그 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났다. 먼 친척뻘 되는 사람이 양녀로 데려갔다는 후문이었다. 그때 이후로 단 한 번도 그를 본 적은 없었지만, 잘 자라서 어엿한 성인이 됐다는 소식은 전해 들었다. 다행히 양부모의 따뜻한 사랑 속에서 잘 컸다는 것에 마음이 놓였다.

 세월은 강산이 몇 번이나 변할 만치 흘렀다. 요즘 들어 구순의 친정엄마를 찾을 때는 은근히 앞집을 염두에 두게 된다. 앞집 할머니는 수해 째 노병으로 누워 계신다. 시난고난 긴 병에 효자 없었던지 자식들도 뜸해졌다. 할머니는 누워 지내면서도 종종 '덕이가 잘 살아야지…'라는 말을 주문처럼 흘리셨다. 오래전 당신이 보내버린 덕이가 평생 대못이 되어 가슴을 파고들었던가 보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았어야 했다는 말을 할 적에는 눈가가 축축했다. 황폐해진 노병에 시달리면서도 덕이 만은 지우지 못했던가보다.

 이제 내 친정엄마나 앞집 할머니 해는 서산에 걸린 희미한 노을빛이어서 어느 찰나에 이승의 강을 건너실지 감지할 수가 없다. 무심한 세월은 검은 머리를 허연 실타래로 만든 것도 모자라 영혼까지 지워간다.

 며칠 전, 불쑥 친정엄마를 찾았다. 앞집 할머니는 양지쪽 마당에서 휠체어에 기댄 채 먼 산에다 시선을 풀어놓고 계셨다. 그런데 할머니 앞에 쪼그려 앉아 벗겨진 양말을 신겨주고 있는 여인이 있었다. 수수한 차림의 그녀가 그리 낯설지 않았다. 궁금한 마음에 발걸음을 당겼을 때였다.

 "점심 먹을 시간이에요 고모" '고모'라니…. 내가 잘 못 들었나 싶어 귀와 눈을 다시 열었다. 순간 정신이 어리둥절했다. 할머니에게 고모라고 부르는 이라면 덕이가 아닌가. 본인이 덕이라고 하기 전에는 몰라보게 변해버린 중늙은이. 그에게도 세월은 비켜가지 않아서 골진 주름 사이로 숱한 사연을 그림자로 드리웠다. 그래도 선명하던 볼우물만은 그대로였다.

 치매를 앓고 있는 고모를 돌봐 드리려 직접 요양사 자격증을 따서 찾아왔단다. 오 남매나 되는 사촌들은 다 어디다 숨겨두고 고모를 지키고 있는가가 궁금했지만, 말을 아꼈다. 그의 어릴 적 모습이 떠올라 잠시 가슴이 먹먹했다. 그 옛날 모질게 구박을 퍼붓던 고모, 혹시 너무 어렸을 때 겪은 '푸른 멍'을 기억하지 못하나 싶었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덩그러니 노인만 남아 투병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선택한 결정, 고모에게 할 수 있는 일이라 망설이지 않았단다. 어떻게 이리도 착한 천사가 될 수 있을까.  진정 나라면 그런 화해의 용기가 있었을까. 어릴 적 '남아선호사상'이 유별났던 엄마의 구박을 여태껏 지우지 못해 마음의 문을 반쯤만 허락하는 이 밴댕이 소갈머리는 언제쯤 철이 들는지.

 이 겨울, 내 좁은 속을 부드러운 햇살로 비추며 들어오는 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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