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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를 널다가 나를 보고 배시시 웃는 감홍시 하나를 집어 꼭지를 돌려 따고 빨아먹는다. 씽크대 아래 선반에 등을 구부린 채 엎드려 있는 현미 포대를 쓰다듬고, 냉장고에 기대어 있는 고구마 상자를 습관처럼 열어본다.

 무화과가 동동 떠 있는 동치미, 갓김치, 배추김치가 가득한 김치 냉장고를 괜시리 여닫는다. 봄부터 가을까지 손톱 밑에 흙이 끼이도록 일 한 적 없는 이 도시 아줌마에게 겨울 곡간이 호사스럽기만 하다. 특히 김치통마다 생산자이신 시어머니, 친정 엄마, 이모, 사돈 어르신 존함을 견출지에 적어 붙이니 천석꾼, 만석꾼이 부럽지 않다. 

 올해는 김장에 유쾌한 사연도 부록처럼 딸려서 김치 맛이 더 좋다. 해마다 김장은 친정 언니들과 한다. 김치를 담가본 적이 없어도 김장 걱정을 해본 적이 없으니 빌붙는다는 말이 맞겠다. 올해 김장은 살림꾼인 큰언니네 경사가 있어서 늦게 하기로 했다. 그런데 하필 한파가 몰아닥친 날 호출이 왔다. 배추값이 올라서 더 이상 늦출 수가 없겠다는 것이다.

 살림꾼에다 알뜰하기가 울산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인 큰언니가 배추값이 오르는 것을 눈뜨고 볼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우리는 급히 언양장에서 만났다. 배추값이 올랐다는 것을 확인한 큰언니는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친정동네에서 배추 농사를 짓는 분께 가보자고 했다.

 다행이 그 분께 배추가 있었다. 며칠 전 김장을 끝내서 고무통에 소금물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거기에 배추를 절여도 좋다는 말에 큰언니가 눈동자를 빛내며 독단적으로 거래를 해버렸다. 배추가 시원찮았지만 그저 얻은 거나 마찬가지라며 큰언니가 배추를 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날은 너무 추웠고 바람까지 불어서 배추를 자르는 사이 얼기 시작했다.

 며칠 전 배추를 절였다는 주인의 고무통에 얼음이 얼어 있었지만 추워서 그렇겠지 생각한 우리는 일사천리로 배추를 자르고 고무통에 넣고 뚜껑을 닫고 이불 속에 들어와 누웠다. 김장 준비를 끝내고 배추를 건지러 간 우리는 깜짝 놀랐다. 배추가 절반도 절여지지 않은 채였다. 소금 농도가 낮아서 물이 얼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배추는 절반이 빳빳하게 살아 있었고 얼어 있었다.

 게다가 날은 너무 추웠다. 멀리 보이는 가지산이 두꺼운 은빛 눈모자를 덮어쓰고 있었다. 그만 배추를 건져서 집으로 가져가자는 큰언니와 소금을 더 넣어 더 절이자는 셋째 언니 사이에 가벼운 실랑이가 시작됐다. 소금물이 얼었으면 소금이 부족하다는 것도 몰랐냐는 엄마의 질책도 날아들었다.

 결국 소금을 더 넣고 건져낸 배추 일부를 다시 통에 넣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날 오후 다시 고무통을 열었을 때 놀라운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소금을 너무 먹은 배추는 짜고, 숨이 죽지 않은 배추는 얼고…. 집으로 배추를 옮겨온 우리는 일단 배추를 씻기 시작했다. 절여진 부분은 얼어서 김치가 될까 의심스러웠고, 덜 절여진 부분은 팔팔하게 살아나서 다시 밭으로 돌아간 판이었다. 

 배추를 버리고 다시 언양에서 사 오자는 편과 내일까지 두고 보자는 의견이 팽팽해졌고 언성이 높았다 가라앉았다. 다음 날 나는 친정에 가지 못했는데 문제의 그 배추로 김장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오후에 큰형부 차로 배달된 김치가 세상 그 어떤 김치보다 맛나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2014년 최고의 기적이자 미스테리라는 큰언니의 문자가 날아들어 한바탕 웃었다.

 김치 냉장고를 열 때마다 요상스럽게 절여져 있던 배추가 떠오른다. 맛도 맛이지만 김치를 꺼내 놓을 때마다 올 겨울 그 에피소드가 붉은 꽃처럼 피어서 식탁이 환하다. 새로 산 옷처럼, 새 김치 맛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겨울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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