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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경우 사과가 떨어지면 먹을 수 있는지부터 살핀다. 어떤 일이 벌어지면 나와의 연관성을 설정하고 이해를 따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과가 떨어진 것을 보고 만유인력을 생각했다는 식의 위인전은 그래서 보통의 경우가 아니다. 에디슨이 병아리 탄생의 순간을 목도하기 위해 알을 품고 지냈다는 이야기부터 유레카를 외친 철학자의 벌거숭이 이야기까지 우리는 이런 류의 보통이 아닌 이야기를 학습하며 교육을 받았다.
 뜬금없이 사과 이야기를 꺼냈지만 실은 너무나 원초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 바로 국제시장 이야기다. 1,000만 관객이 응시한 이 영화는 우리 아버지 시대의 이야기다. 덕수로 대변되는 주인공은 우리 시대 아버지의 또 다른 이름이며 국제시장은 바로 그 아버지들이 등짝이 타들어가도록 누비고 다닌 골목이다.
 문화논객을 자처하는 한 인사가 영화 국제시장이 상영되자마자 이념논쟁을 시작했다. 영화 평론가 겸 방송인이라는 이 인물의 천박한 한마디에 진보논객이라는 간판을 건 인사들이 우군이 됐다. '애국을 포장한 선동'이라거나 '토 나오는 영화'라는 식의 이념논쟁 수준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까놓고 보면 보수 대 진보, 여당과 야당, 영남 대 호남의 오래된 무조건적인 비난이다.
 

 우리 사회는 언제부턴가 어떤 문제에 대해 진지한 고민이나 논쟁은 없고 비난과 악플이 난무하는 사회가 됐다. 일단 나와 다르면, 우리와 다른 색깔이면 까고 본다. 흠씬 두들겨 패놓고 나서 CCTV를 뒤적거린다. 어떤 놈의 주먹이 먼저 나갔는지, 어떤 놈의 입에서 쌍소리가 튀어 나왔는지를 미세한 프레임 단위로 잘근잘근 편집해 낸다. 단연 그 분야에선 독보적이다.
 이런 판국에 본질은 중요하지 않다. 아버지 세대에 대한 헌사든, 얼마 전 우리 현대사에 치열했던 시간이든 중요하지 않다. 그 장면 그 대사가 지금 자신의 진영논리에 맞지 않으면 까야한다. 두들겨 패서 푸른 멍이 아니라 골수에까지 진통이 느껴져도 상관없다는 식이다.
 

 논란의 중심에 선 국제시장은 '해운대'로 천만클럽에 가입한 윤제균 감독의 작품이다. 그의 고향은 부산이다. 그는 이 영화를 '아버지에 대한 헌사'로 만들었다고 밝혔다. 영화를 만들 때는 소통과 화합을 염두에 뒀는데 개봉하자마자 소통과 화합은커녕 논란과 갈등이 생기고 좌우, 진보와 보수 등 나라가 양편으로 나뉘어 가슴이 아팠다는 윤 감독의 인터뷰가 언론에 나오기도 했다.
 문제는 그의 의도가 아니다. 변호인이 영화로 나왔을 때, 영화 '광해'가 대선 분위기를 타고 1,000만 관객을 불어 모았을 때도 우리는 영화 하나 놓고 좌우로 갈렸다. 뭐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영화가 아니라 영화를 읽고 해석하는 우리에게 있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다룬 '국제시장'을 개봉한 다음날 봤다. 어떤 장면에서는 입이 벌어졌고 어떤 장면에서는 눈가에 뜨거운 기운이 돌았다. 누군가는 이 영화를 두고 아버지 세대가 일군 대한민국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했지만 동의하지 않는다. 그냥 덕수로 대변되는 한국전쟁 세대의 삶을 그린 영화다. 그 중심은 국가가 아니라 가족이다. 목숨을 건 덕수 아버지의 피란길이나 파독 광부나, 베트남전 모두 가족을 위한 아버지들의 혹은 어머니들의 치열한 삶의 기록이다. 이따금 영화에 등장하는 이산가족 상봉이나 국기 하강식 이야기는 그 시절, 우리 세대가 경험했던 생활 속의 일상적 경험이었다. 
 

 이런 영화를 두고 젊은 논객 하나가 "머리를 잘 썼다. 어른 세대가 공동의 반성이 없는 게 영화 명량 수준까지만 해도 괜찮다. 그런데 국제시장을 보면 아예 대놓고 '이 고생을 우리 후손이 아니고 우리가 해서 다행이다'라는 식이다. 정말 토가 나온다는 거다. 정신 승리하는 사회라는 게"라고 발언을 했다.
 그가 뭐라 하든 관심이 없다. 다만 그의 발언 이후 국제시장이라는 영화가 이념의 천박한 입씨름에 오르고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건 아버지세대의 희생이 매도당했다면 그건 다른 문제다. 영화의 과장성이나 구성, 작위성 등에 대한 건강한 평론 대 평론이라면 우리는 즐거울지 모른다. 본질이 실종된 논쟁은 말싸움이고 멱살잡이다. 바로 그 지점이 대한민국 문화논객들이라는 자들이 먹고사는 공간이다. 가능한 튀고 보자는 깡통들의 울림에 종편과 몇 몇 매체들이 자극적인 레이아웃으로 박수꾼을 모은다. 박수치고 고함지르고 더 흥분해 거리로 나서면 성공이다. 하지만 말이다. 이런 류의 소음이 유통되는 사회는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선동을 누가 하는지, 이슈화를 누가 의도적으로 시키고 있는지를 침묵하는 다수는 슬쩍 페이지를 넘기는 듯 보이지만 다 알고 있다. 다만 천박한 그 입에 입 맞추기 싫어 악취가 날아갈 때를 기다릴 뿐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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