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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은 산골이다. 읍내를 오가는 버스가 하루에 한 대뿐이어서 어쩌다 만나는 트럭도 신기했다. 눈에 띄는 것이라곤 전부 자연뿐이었다. 손바닥만한 하늘과 돌계단처럼 들쭉날쭉한 다랑논과 민둥산이 고작이었다. 막내와 큰오빠가 열두 살차 띠 동갑, 그 사이에 다섯이 더 있어 고만고만한 일곱 남매가 친구처럼 자랐던 산골. 덕분에 사람이 그립지는 않았다. 부족한 것은 읽을거리였다. 자연이 주는 지혜는 많았지만 지식 면에서는 무지렁이가 되기에 알맞은 환경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큰오빠가 대도시의 고등학교에 진학한 일이었다. 방학이면 집에 오는 오빠의 책가방은 우리 남매들에게 이동도서관이었다. 오빠의 책가방에 든 것은 오빠 자신보다는 동생들을 위한 책들로 가득했다. 모두가 누군가가 읽었던 책들이었는데 오빠가 자신의 용돈을 아껴서 마련한 것이다. 과월호 '어린이'며 학생잡지에서부터 '15소년 표류기' 같은 소년소설들이 대부분이었다. 들판이나 쏘다니는 동생들이 안타까웠던 오빠의 배려였다. 공깃돌이나 콩 주머니, 나무막대기를 들고 놀던 동생들의 동적인 시간을, 밑줄을 그으며 상상하는 정적인 시간으로 변화시킨 이동도서관.
 

 노는 것도 지겨웠던 우리들에게 낡은 책들은 새로운 놀잇감이었다. 오빠의 가방은 마치 보물을 쏟아내는 흥부네 박 같았다. 오빠보다 오빠의 책가방을 더 반겼을 정도니까. 책에서 풍기는 묵은 냄새들도 싫지 않았다. 곰팡이 냄새 같기도 하고, 막걸리와 김치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이런 시절을 보낸 터라 도서관 건물은 늘 어린 시절과 겹쳐진다. 먹을 것이 부족해서 구황작물로 허기를 때웠던 시절. 지독한 책의 가뭄 속에서 책읽기에 목말랐던 기억이 늘 함께 한다. 그래서일까. 수(數)적으로 많아진 도서관이 참으로 반갑다. 건물의 겉모습도 정다워졌다. 아담한 모양새에 어울리는 알락달락한 건물들은 동화속의 집처럼 끌린다. 병원이나 요양시설처럼 흰 페인트로 칠해진 도서관이 시각적으로도 친근감을 주지 못했던 걸 감안하면 모습부터 발전된 것이다.
 

 달라진 겉모습에 걸맞게 도서관의 역할도 확대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운영하는 프로그램이 다양해졌다. '장서를 보관하는 집' 정도로나 여겼던 도서관이 정서적인 휴식처가 되고, 격조 있는 사랑방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저 책이나 빌리고, 필요한 자료를 열람하거나, 시험공부나 하려고 들르는 공간만이 아닌 도서관. 삶의 전반을 들여다볼 수 있는 책과 관련이 있는 프로그램들이 이용자들의 요구에 친절하게 펼쳐진다.
 독서를 중심으로 하는 작은 동아리들이 그 중심에 있다. 자신의 독서취향에 따라 책을 읽고 생활을 나누면서 동반성장을 하는 독서회는 도서관마다 운영되고 있다. 도서관은 취미생활을 비롯한 배움의 장이 되기도 한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운영하는 프로그램들도 그만큼 다양하다. 교과교육 외의 배움에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의 지적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함이다. 시간의 틈새를 비집고 드는 잡념들을 사색으로 발전시키는 곳도 도서관이다. 전시실을 갖춘 도서관도 있다. 동화의 원화나 문인화, 다양한 시화가 전시된 도서관은 마치 그림책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신비롭다.
 

 물론 아직은 수(數)적인 면에서 도서관은 턱없이 부족하다. 무엇보다도 어린이들이 가까이 하기에는 거리상 문제가 있는 곳이 대부분이다. 자라나는 새싹들이 자전거나 도보로 안전하게 오갈 수 있는 작은 도서관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 이는 어른들에게도 해당되는 문제다. 책 한 권을 빌리고, 필요한 자료를 찾기 위해 반드시 탈 것을 이용해야 하는 일은,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문제로만 끝나는 사항이 아니다. 도서관의 규모에 비해 주차장이 겸비되어야 하는 까닭이다.
 누구에게나 틈새시간은 있다. 그런 틈새시간이 찬바람이나 부는 골목으로 외면당하지 않도록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 여기에 도서관도 그 몫을 해야 한다. 틈새시간을 아름다운 여백으로 채울 수 있는 방법과 여건을 제공하는 사랑방. 부디 천천히 걸어서 드나들 수 있을 만큼 친근한 거리에 더 많은 도서관이 생겨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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