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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균 감독의 영화 '국제시장'이 1,000만 관객을 넘어섰다는 소식이 들린다. 2,30대는 '부모 세대를 이해하는 디딤돌'로, 5,60대는 '지난했던 시절에 대한 향수'로, 저마다 영화를 통해 느끼는 소회는 다르지만, 세금과 일자리 문제로 세대 간 갈등이 어느 때보다 증폭된 요즘, 서로 다른 세대를 한 스크린으로 불러들여 눈물을 쏟거나 뭉클하게 만드는 영화의 힘은 대단하다 하겠다.
 난 그 영화를 아직 보지 못했는데, 전쟁 직후 시장의 모습이 영화에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좀 궁금하다. 아마 내가 초등학교 때 처음 가보았던 고향 대전에 있는 문창시장 같지 않을까. 변두리 시장이라 규모 면에서 국제시장에 비할 바가 못되겠지만 말이다.
 

 문창시장은 우리 동네에서 예닐곱 정거장 떨어진 곳에 있던 상설시장이다. 군것질 할 가게 하나 변변히 없던 시절, 어머니가 가끔씩 사들고 오시는 밥풀과자나 꽈배기에 눈과 입이 황홀해져 시장에 가면 저런 것을 실컷 사먹으리라 마음먹기도 했지만, 사실 처음 시장에 가면서 가슴 두근거린 것은 서정다리 때문이다. 어린 시절 우리는 대개 "누구누구는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소리를 듣고 자랐기 때문인데, 그 다리가 바로 대전천의 제방인 서정 마뚝을 지나 문창시장 초입에 있는 서정다리였다.
 여름이었고, 다리 아래는 서늘하고 어둑신했다. 아, 그리고 양철 조각이나 나무 판때기, 거적으로 얼기설기 엮어놓은 움막들. 거적때기를 들추고 나오는 머리가 부스스한 거지 여자와 눈이 마주쳐, 숨이 멎을 듯 서 있다가 도망쳐온 기억이 난다. 움막은 다리 밑 뿐 아니라 둑 아래 천변을 따라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전쟁이 끝난 지 십 년이 훨씬 지났지만 그 상처가 워낙 깊어, 시장 주변에 부스럼딱지처럼 남아 있던 것이다. 하긴 쇠갈고리 손을 한 상이군인들이 커다란 바구니를 둘러메고 넝마를 줍는 모습을 심심찮게 보던 시절이다. 그날 시장에서 무엇을 구경하고 사먹었는지는 잊었지만 상처에 앉은 굳은 딱지 같던 움막들은 선명히 뇌리에 남아있다. 그러니까 내게 시장에 대한 첫 이미지는 떠들썩하고 은성한 장터마당이 아니라, 천변에 엎드린 움막의 양철 지붕위로 바스러지던 오후의 햇살처럼 왠지 쓸쓸하고 고즈넉한 것이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흘렀다.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분야가 빠르고 눈부시게 변했지만, 자본이 유통되는 시장이야말로 가장 빠르게 변해오지 않았나 싶다. 시장 주변의 움막들은 얼마 뒤 거짓말처럼 헐리고, 대전천은 도심 부분에서 복개되어 홍명상가란 종합상가가 들어섰다. 지금은 그마저도 오래전에 헐리고 롯데나 갤러리아 같은 백화점에 홈플러스, 이마트, 코스트코 같은 대형마트들이 성업 중이다.
 다른 도시도 사정이 다르진 않을 것이다. 울산도 주리원이나 모드니 같은 향토 백화점이 언제 없어졌는지 기억이 가물거리고, 역전시장이나 중앙시장 같이 사람들이 왁자하게 몰리던 재래시장도 이제 어지간히 한산해졌다. 온누리 상품권 제도를 시행하고, 아케이드나 공영주차장을 설치하고, 여러 가지 축제나 이벤트를 개최하는 등 자구책을 마련하기 위해 애쓰지만, 대형마트나 복합쇼핑몰로 떠난 손님들의 발걸음을 돌리기엔 역부족이다. 아니, 대형마트의 운명도 빠르고 늦음이 있을 뿐, 기울어가는 해의 서늘한 찬란함이 아닐까. 온라인 쇼핑몰이라는 오픈마켓이 활성화 되면서 시장이라는 형태가 스마트폰의 앱 안으로 들어가는 유통구조의 대변화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빠르게 변화하고 순식간에 사라져가는 LTE 속도의 시대에 견고하고 영원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가 다른 사람의 어깨를 스치며 시장통을 지나가거나. 상인들과 거스름돈을 주고받을 때 느끼는 묘한 쓸쓸함은 언젠가는 사라져갈 것에 대한 우수와 연민이 아닌지. 그러니 햇살이 남아 있을 때 즐기자. 특별히 살 것이 없더라도 주머니에 손을 넣고 시장통을 어슬렁거려 보고, 그러다 눈에 띄는 물건이 있으면 쭈그리고 앉아 흥정을 해보자.
 다행히 '국제시장'의 흥행은 부산과 국제시장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불러일으켜, 부산 관광객이 급증하고 국제시장의 명물인 씨앗호떡이나 유부주머니 같은 먹거리 판매가 크게 늘었다고 한다. 그렇다. 많은 이야기와, 정서적 교감과, 함께 한 시간과 기억들이 있는 시장 아주머니의 '손맛'을 오픈마켓 앱 안으로 일률적으로 집어넣기엔 아직 무리다. '언젠간'일지 몰라도 '아직은' 아니다. 그리고 그 오랜 기억이 시장의 매력일 것이다. 나도 이제 집 근처 시장에 가서 그 시장의 명물이라는 구수한 칼국수를 맛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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