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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이란 말은 얼마나 태평스러운가. 느릿느릿한 여유로움이 묻어난다. 태평소의 유장한 가락. 한가함을 넘어 살짝 게으른 기미까지 엿보이는 천하태평이란 말. 그러므로 태평성대란 이런 느긋함을 즐길 수 있는 시대 아닌가. 나라에 혼란이 없이 백성들이 편안한 시대. 세상이 크게 평화롭고 융성한 시대. 흔히 중국의 요순시절이 태평성대였다고 하는데, <제왕세기>에 실린 '격양가'가 그 시대를 잘 묘사하고 있다.
 '일출이작(日出而作) 일입이식(日入而息) / 착정이음(鑿井而飮) 경전이식(耕田而食)/ 제력어아하유재(帝力於我何有哉)'
 뜻을 풀이하자면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고/우물 파서 물마시고, 밭을 갈아 밥 먹으니/ 임금의 힘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라는 내용이다. 요임금 때 8, 90세 노인들이 땅을 두드리며 불렀다는 노래이다. 이 시를 읽으면 농부들이 부지런히 일하는 모습 대신 왠지 햇살 따뜻한 봄날, 나무 아래서 느긋하게 쉬고 있는 모습이 떠오른다.
 

 요순시대는 아직 그 실재가 정확히 파악되지 않은 상고시대지만, 시를 좀 더 들여다보면 요즘에도 적용할 수 있는 태평성대의 모습이나 조건 같은 것이 그려진다. 해가 뜨면 일한다. 이것은 누구나 일할 수 있는 직장이나 직업이 있는 사회이다. 실업률은 최소이고, 사람들은 원하는 직장에서 일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대체로 자신의 직장에 만족하며 다니는 사회. 이것이 태평성대의 첫째 요건이다. 해가 지면 쉰다. 이것은 바로 휴식권의 보장이다. 일을 하되 알맞은 시간, 필요한 만큼 일을 하고 충분한 여가와 휴식, 수면이 보장되는 사회가 태평성대의 두 번째 요건인 셈이다. 우물 파서 물 마시고 밭을 갈아 밥을 먹는다는 것은 일한 만큼의 대가가 충분하여 빚이나 대출 없이 집을 마련하고 생활이 가능한 사회이다. 그리고 임금의 힘이 내개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 하는 것은 임금의 존재, 즉 정치에 별 관심이 없다는 얘기다. 물론 이것은 실제 무관심이 아니라 정치가 생활에 있는 듯 없는 듯 스며들어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잘 통치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요임금도 노인의 이런 반응에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태평성대란 대단히 거창하고 굉장한 시대가 아니라, 가장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꿈이 이루어지는 시대라 할 것이다. 누구나 적당한 때 졸업을 하고 직장을 잡아 독립을 하여 행복하고 평온한 가정을 이루기를 꿈꾼다. 근무 시간이나 복지 면에서 직장이 만족스러우면 더욱 좋고 가능하면 퇴사 압력 없이 오래 다니기를 원한다. 비록 작은 평수라도 대출 없이 집을 마련하거나, 대출을 받더라도 가계에 크게 부담스럽지 않은 범위 안에서 자가가 해결되길 바라는 것이다.
 그런 사회라면 정치가 내게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 하며 정치는 정치가에게 맡기고 나는 생업에 충실할 수 있겠다. 우리 몸이 아프지 않으면 몸의 각 기관이 어디 있는지 신경도 쓰지 않고 살다가 어디 아프기라도 하면 온 신경이 아픈 곳을 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건강할 때 몸이 어디 있는지 잊고 사는 것처럼 시민들이 정치에 '무심'한 사회가 태평한 사회라 할 것이다.
 

 물론 그런 시절이 쉬이 오겠는가. 아니, 있기나 했던가. 생명부를 잘못 읽어 너무 일찍 데리고 온 영혼을 인간세계로 돌려보낼 때, 누구는 왕후장상을 바라고 누구는 억만장자를 바라서 그대로 해주었는데, 마지막 사람이 착한 아내를 얻어 아들 딸 낳고 천수를 다할 때까지 오래오래 알콩달콩 살고 싶다고 했더니 염라대왕이 '예끼, 그런 자리가 있다면 내가 가겠다'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는 것처럼, 소박한 바람이 사실은 소박한 게 아닌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어쩌면 자본주의니 현대니 하는 말들이 태평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도 든다. 서로 작은 이득이라도 차지하려고 아귀다툼을 벌이고, 모든 것이 숨 가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크게 평화롭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삼월이 다가오지만 공기는 여전히 냉랭하고,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다는 삼포세대를 넘어 인간관계와 집까지 포기해야하는 사포세대, 오포세대인 청년들의 아우성과, 증세와 복지 문제로 이곳저곳에서 파열음과 불협화음이 들리는 날들이라, 마음속으로나마 태평성대를 그려 보았다. 태평성대에는 봉황과 기린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는데, 이 상상의 동물처럼 태평성대도 인간이 만들어낸 상상의 산물, 혹은 박제된 관념은 아닌지. 무릉도원을 그린 이발소 그림처럼 말이다. 그러고 보니 요임금이나 순임금은 자신의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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