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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을 받고 올라올 봄나물을 만날 요량으로 집을 나섰다. 동네를 벗어나 도로를 건너고 새로 지은 교회 뒤로 가면 이내 가슴이 탁 트이는 들판이다. 이른 봄나물로는 쑥과 냉이가 으뜸이다. 양지바른 찔레 덩굴 아래 남 먼저 얼굴을 내미는 뽀얀 쑥과 겨울삼동을 버티다가 봄볕에 쌉싸래한 맛과 향을 선물하는 냉이야 말로 봄의 전령사가 아니던가.
 그새 논두렁 밭두렁에는 납작한 쑥이 한창이다. 옹기종기 둘러앉은 냉이가 파릇하게 물이 올랐다. 눈가는 대로 욕심을 부렸더니 금방 한 소쿠리다. 겨우내 김장김치에 시들해진 입맛에는 냉이 무침과 쑥국이 제격이다. 냉이는 끓는 물에 살짝 데쳐 물기를 꼭 짠 다음 자잘하게 썰어 참기름과 갖은 양념을 넣고 무치고, 쑥은 멸치와 다시마로 진하게 육수를 내고 들깨 거피로 조물조물 버무리다가 된장을 적당히 풀어 넣고 끓이면 밥 한 공기쯤이야 게 눈 감추듯 할 것이다.
 아직은 물끄러미 서 있는 감나무 밭을 지나 자그마한 웅덩이가 있는 실버들 아래 자리를 잡고 앉았다. 훈훈한 남풍은 곡선으로 늘어진 연둣빛 버들가지어깨를 간질이며 봄노래를 청한다. 아지랑이가 가물가물 피어오르는 파릇한 들판 위로 오래전 기억하나가 날아오른다.
 여남은 살쯤 되었을까. 학교를 파하고 언니와 쑥을 캐러 간 날이었다. 동네 저수지 쪽 양지바른 들에는 봄이 서둘러 찾아들었다. 통통하고 뽀얀 쑥을 언니랑 경쟁하듯 정신없이 캐는데 어디선가 미나리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사방을 살피던 내 눈에 저만치 잘팍하게 물이 고인 곳에 파란 미나리꽝이 보였다. "아! 미나리"라고 속으로 외치면서 욕심이 발동했다.
 

 우리집에는 미나리꽝이 없었다. 해서, 미나리꽝이 있는 친구가 제일 부러웠다. 길을 가다 실개천에서 보는 미나리는 절대 놓치지 않았다. 그렇게 좋아하는 미나리를 어찌 지나칠 수 있었겠는가. 살금살금 도둑고양이가 되기로 했다. 차가운 물이 고무신 안으로 잘팍하게 들어와 발이 시렸지만 참을만했다. 한 뼘쯤 자라 한창 먹기 좋은 미나리는 보기만 해도 입안에 침이 고였다. 기분 좋게 한 움큼 거머쥐었다.
 "거기서 뭐 하노!"
 난데없이 낯선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머리가 쭈뼛 서고 전신은 감전이라도 된 것 같았다. 주변을 살필 새도 없이 무조건 뛰어야 했다. 뒤에서 주인이 쫓아오고 있다는 생각에는 죽을힘을 다해도 모자랄 판이었다.
 얼마나 도망쳤을까. 등줄기에 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고 다리가 더는 말을 듣지 않겠다고 했다. 걸음을 늦추면서 조심조심 고개를 뒤로 살짝 돌렸을 때였다. 아, 이럴수가! 아무도 없었다. 그림자만 말없이 내 뒤를 따랐다. 대체 어찌 된 일일까. 제대로 정신을 차린 곳은 집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건넛마을이었다. 그제야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두고 온 언니가 걱정이었다. 지금쯤 주인한테 붙잡혀 이실직고해야 할 언니를 생각하니 목에 신물이 올라왔다. 우리 집으로 찾아간 미나리꽝 주인이 순경을 불러놓고 내가 오기를 여우 눈으로 기다릴 것을 생각하면 입술이 바짝 말랐다. 길바닥에 꼬챙이로 곱하기 더하기를 수도 없이 그리며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내 속내를 길가에 핀 달개비 꽃만 알고 있었다. 노란 달개비는 길게 목을 빼고 수심에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날이 어둡기 전에 가서 용서를 빌면 어떻겠냐고….
 

 막상 검은 산그늘이 마을을 덮치자 마음이 급해졌다. 집으로 향하는 두 다리가 떨려오고 가슴이 방망이질할수록 어금니를 앙다물었다.
 집 앞대문 안을 기웃거렸지만, 기척이 없었다. 불빛이 새 나오는 방 안에서는 식구들이 저녁밥을 먹는 소리만 달그락거렸다. 끼를 굶은 배속에서는 꽈리 부는 소리가 났지만, 밥 생각은 밥알만큼도 없었다. 한참 뒤에야 방문을 열고 나오는 언니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언니야, 괜찮나?" "동생이 불렀는데 와 도망쳤노…." 남동생이 누나들을 불렀을 뿐이었는데, 내가 지레 겁을 먹고 줄행랑을 친 것을 그때야 알아차렸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순전히 착각이었다. 언니는 부모님께 모든 걸 말씀드린 후였다.
 "남의 것을 넘보면 두 번 다시 용서하지 않겠다"는 아버지는 뜻밖에도 빙긋이 웃으셨다. 그날 이후로 절대 미나리는 먹고 싶지 않았다. 다시는 남의 것에는 마음을 두지 않기로 작정했다. 그해 봄 미나리사건은 나를 훌쩍 성장시켜 놓았다.
 봄은 쑥과 냉이, 미나리처럼 파릇하고 상큼한 맛과 향이 있어서 좋다. 예나 지금이나 미나리 맛은 여전하다. 부부로 살면 식성까지 닮아 가는지 남편은 봄내 미나리 타령이다. 동창회 모임에 간 남편이 미나리 두 단을 들고 온다는 연락이다.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데 철 이른 노랑나비 한 마리가 내 뒤를 팔랑팔랑 날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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