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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하는 학생들에게 선물을 하려고 필기구를 사러 갔다. 요즘 필기구는 종류나 모양, 색깔이 하도 다양해서 사탕 코너 앞에 선 어린아이처럼 무얼 고를지 망설여진다. 결국 샤프와 형광펜 몇 자루를 들고 나오면서 필기구에 얽힌 몇 가지 추억을 떠올렸다.
 

 지금은 거의 사라져가는 필기구지만 우리는 중고등학교 때 펜과 잉크를 사용했다. 중학교에 입학하여 처음으로 유리병에 담긴 남빛 잉크에 펜촉을 담그던 두근거림을 지금도 기억한다. 잉크는 푸른 피처럼 진하고 향기로웠다. 하지만 펜은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 잉크가 튀거나 번지기 일쑤였다. 잉크병 뚜껑을 잘못 닫은 채 가방에 넣었다가 책을 버린 일도 많았다. 펜을 오래 쓰다 보니 펜촉이 닿는 가운뎃손가락 끝부분이 푸르스름하게 변하기도 했다. 더구나 하얀 하복에 잉크를 쏟았을 때의 난감함이란. 그래서 우리의 학창시절은 대체로 푸른빛으로 기억된다. 종아리를 스치던 플레어스커트나 허리를 잘룩하게 만든 동복이 모두 짙은 남빛이었고, 어깨가 기울도록 무거웠던 책가방도 검정에 가까운 남색이었다. 거기에 종종 푸른 잉크를 쏟게 되면 하이타이를 짙게 풀어 한없이 문지르곤 했던 것이다.
 

 대학교 때는 만년필을 즐겨 사용했다. 입학 선물로 받은 자주색 파카 만년필을 거의 졸업할 때까지 사용했다. 지금은 그러지 못하지만 젊은 시절엔 혼자 이곳저곳 돌아다니길 좋아했는데, 여행 가방에 챙겨 넣는 것이 백지로 된 노트와 엽서 몇 장, 그리고 만년필이다. 다도해가 보이는 산자락에서, 을숙도의 갈대밭에서, 수덕사와 화엄사의 돌계단에 앉아 만년필로 빈 노트와 엽서에 풍경과 사람들을 그려 넣었다. 그리고 그리운 사람들에게 내 스케치가 담긴 엽서를 부치곤 했다.
 만년필의 우아한 곡선은 날렵하고 매끄러우며 아름답다. 오랫동안 손에 쥔 만년필은 생명을 지닌 듯 따뜻하다. 특히 잉크를 넣을 때의 말랑말랑한 감촉이 좋았다. 몇 해 전, '꼬마 니콜라'로 유명한 장 자크 상페의 삽화 전시회를 보러간 적이 있다. 가느다란 펜으로 슥슥 그려나간 개구쟁이 니콜라와 친구들은 유머러스하고, 부드러우면서도 활기찼다. 그러고 보니 만년필이나 펜은 사각사각 글씨 쓰는 소리와 잉크의 향기가 겹쳐지는 매우 감각적이고 따뜻한 필기구 같다.
 

 연필은 어떤가. 연필은 음영을 자유자재로 넣을 수 있어 천의 표정을 지닌 필기구이다. 드가의 연필 스케치는 부드럽고 우아하며, 극사실주의 화가인 디에고 파지오의 연필화는 흑백사진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하고 섬세하다. 한때 '반지의 제왕'에 빠져서 삽화를 그린 앨런 리의 스케치북을 거금을 들여 구입한 적이 있다.
 연필은 요정이나 골룸 같은 환상의 생명체와도 잘 어울린다. 종이 한 장과 연필 한 자루로 세상과 소통하는 연필화를 보면 그림을 잘 그린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새삼 느껴진다. 오래 전, 친구의 졸업 공연을 본 뒤 4B 연필을 선물한 적이 있다. 공연 선물치고는 좀 생뚱맞은 편이었는데, 친구는 얼마 뒤 그 연필로 벽에다 반구대 암각화에서 본 고래를 그리고 있다고 소식을 전해 왔다. 울산에서 살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던 시절의 일인데, 나는 그 고래를 따라 울산에 왔고, 그 친구는 고래를 따라 하늘로 떠났다. 페르세우스가 들어 올린 메두사의 머리를 보고 돌이 된 고래 케투스를 포세이돈이 불쌍히 여겨 하늘의 별자리로 만든 것이 고래자리라는데, 이후 가끔씩 고개를 들어 고래자리가 어딘가 찾아보며 친구를 떠올리곤 한다.
 

 마지막으로, 등사기에 얽힌 몇 가지 기억들(등사기는 인쇄기이지만 철필로 직접 글씨를 쓴다는 점에서 필기구를 닮았다). 대학 때 한 삼 년 간 야학 교사를 한 적이 있다. 나는 국어와 역사를 가르쳤는데, 검정고시 준비 때문에 거의 매달 시험을 보았고, 그때마다 시험 내용을 일일이 등사지에 써서 인쇄를 해야 했다. 국어는 지문이 많아 철필로 쓰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철필에 힘을 잘못 주면 등사지는 밀리거나 찢어졌고, 롤러를 잘못 밀면 잉크가 뭉개져 나왔다. 한 장 씩 밀다 보면 나중엔 어깨가 뻐근해지고 온몸이 쑤셔온다. 지하에 마련된 야학 교실은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아 늘 텁텁했고, 가끔씩 전기가 나가서 촛불을 밝혀야 했다. 석유난로에 옷을 태우거나, 등사 잉크에 옷을 버리는 일도 자주 있었다. 그래도 오랫동안 야학에 매달린 걸 보면 내가 그 일을 꽤 좋아했던 것 같다.
 

 시험 문제를 내고 나면 여백이 남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대개 '수고하셨습니다'하는 글자를 도장처럼 새겨 넣는데, 그때는 꽃샘추위가 코끝을 맵게 하던 엄혹한 시기였다. 나는 철필을 들어 이젠 제법 능숙해진 솜씨로 어린 시절의 동요를 써내려갔다.
'가만히 귀대고 들어보면/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물/ 봄이 온다네 봄이 와요/ 얼음장 밑으로 봄이 와요' 아직 여백이 남았다. 이절을 마저 적었다. '겨우내 잠자던 물레방아/ 기지개 켜면서 잘도 도네/ 봄이 온다네 봄이 와요/ 물레방아 돌리면서 봄이 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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