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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대부분 사랑해서 결혼한다. 한때 죽고 못 살만치 달아오르던 남녀의 정분도 시간이 흐르면 미지근해지거나 퇴색되고 마침내 '이별'을 택하는 경우를 간혹 본다. 소중한 인연이 갈라서기로 마음을 정하면 지난날 함께 그렸던 아름다운 무늬는 정리해야 한다. 그런데 만약 둘 중 한 사람이 일방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을 다 하고 난 후에 맞는 이별이라면 더 견디기 어려운 아픔이 될 것이다.
 단독주택 이 층에서 살 때 있었던 일이다. 위층은 주인인 우리가, 아래층은 젊은 부부가 예닐곱 살쯤 되는 사내아이를 데리고 세 들어 살았다. 아래층은 우리보다 젊은 부부라 그런지는 몰라도 늘 꿀 냄새가 폴폴 났다. 저녁이면 구수한 된장국 냄새가 부엌에서 새어 나오고 까르륵 식구들의 웃음소리가 창틀을 넘나들었다. 비록 세 들어 살지만, 어떤 부자를 부러워하지 않아도 될 만치 충분히 행복해 보였다. '삶'이란 비단천을 한 올 한 올 그들만의 결 고운 무늬로 짜고 있다는 생각이 진했다.

 아침에 남자가 대문간을 나설 때는 언제나 말쑥한 여자와 아이의 배웅이 따랐다. 골목을 꽉 채우며 저만치 걸어가는 남자를 한참이나 바라보고 섰던 그녀, 그때 아침 햇살은 여자의 머리 위로 은 화살을 마구 쏟아 붓고 있던 장면은 어제 본 듯 선하다. 진정 소박한 행복이 어떤 것인지를 내게 보이던 아래층 가족이 부디 우리 집에 오래 머물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런 날은 오래가지 못했다. 언젠가부터 남자의 고함이 담장을 훌쩍 넘었다. 사노라면 그럴 수도 있으려니 싶어 애써 귀를 덮었지만, 심상찮은 마음은 줄어들지 않았다. 다툼은 잦아져 부부싸움은 도가 지나쳤다. 이웃은 안중에도 없고 온 사방으로 '사네 마네'라는 말을 던졌다. 그때마다 아이 울음이 들리면서 세간들이 공중부양을 당해 죽는소리를 내지르며 마당 가운데로 나가떨어졌다. '칼로 물 베기'라는 단순한 부부싸움이 아니었다. 그로 인해 이층집과 주변은 순식간에 검은 구름으로 덮였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도저히 그냥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그녀를 불러 자초지종을 물었다. 탁자 위에 차를 준비하고 마주앉았다. 여자는 마른 입술을 찻물로 축이며 말문을 열었다. 가만히 귀를 모으고 있던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생각보다 자분자분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녀는 남자를 무척 사랑했다. 오로지 남자와 시부모만을 위해 사는 사람처럼 결혼생활에 지극정성을 다했다. 시부모를 내 부모보다 더 거두고 따랐다. 집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변방동네에 있는 시댁을 거의 날마다 들러 어른들과 함께 지내다가 저녁나절이면 다시 집으로 돌아와 살림살이를 챙겼다. 남자와 시부모를 위해서라면 가슴 속에서부터 우러나는 마음을 다했다는 말을 할 적에는 찻잔을 거머쥔 그녀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한번은 난데없이 시어머니가 집 앞 도로에서 크게 교통사고를 당했었다. 그걸 알고 119보다 더 빨리 달려가 어머니를 등에 업고 단숨에 근처 응급실을 향해 달리면서 "꼭 살려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라는 말로 환자를 안심시켰다. 그 후 일 년여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한 끝에 시어머니는 무사히 건강을 되찾았다.
 그런 날이 다 화근이 됐던지 여자는 자주 피곤이 몰려오는 증세가 나타났고, 찾아간 병원에서 천청벽력 같은 '유방암' 판정을 받았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냈지만, 여자의 자존심인 가슴은 잃어버린 후였다. 여자는 우울증이 찾아오고 삶의 끈을 놓을 만치 시들어 갔지만, 남자와 아이를 생각하며 용기를 냈다.
 하지만, 남자는 달랐다. 수술을 받은 이후로 차차 냉담해지기 시작하더니 온갖 트집을 부렸다. 생각 끝에 시댁을 찾아 도움을 요청해 보았지만 애써 아들 편을 들며 지난날 보여주었던 며느리의 지극했던 진심을 외면했다. 여자는 결국 가족으로부터 외톨이로 버려지는 처지가 되었다. 그런 엄마가 불쌍하게 보였든지 아이는 가끔 '엄마가 너무 불쌍해'라는 말을 했다. 그런 여자와 아이를 남자는 밀어내고 있었다.
 남자는 이혼을 원했다. 어떤 말이나 행동으로도 그의 마음을 바꾸지 못할 정도로 냉랭했다. 한계를 느낀 여자는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데리고 '이혼'을 결심했다. 그런 다음 마지막으로 남자가 보는 앞에서 '아빠와 엄마가 이혼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아이에게 물었다. 아이는 망설이지 않고 '엄마가 이혼하지 않으면 불쌍할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는 대목에서는 진한 눈물방울을 툭툭 떨어뜨렸다. 여자는 입술을 깨물면서 흐르는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우리에게 언제, 어떤 이유로 이별의 아픔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그런 아픔을 알면서도 모르는 것처럼 사랑하는 것이 인생일까. 사랑은 영원할 수 없는 건가.
 '일생동안 고락을 함께할 부부의 약속'은 모두 거짓말이란 말일까. 그녀 앞에서 나는 눈물이 반쯤이나 섞인 차를 단숨에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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