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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비평사(창비)를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3학년 때다. 시의 종류에 대해 배울 때, 참여시의 예로 국어 선생님은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이란 시를 읽어주셨다.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로 시작하는 그 시는 교과서에 나오는 어느 시와도 달랐다. 강렬하고 호소력이 있었다. 나는 충격에 빠졌다. 교무실에 찾아가서 시의 전문을 베껴왔고, 외울  때까지 거듭 읽었다.

 대학에 가서 인문학책들이 창비신서란 시리즈물로 출간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환시대의 논리> <분단시대의 역사인식>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다산시선> 같은 창비신서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 <객지> <변방에 우짖는 새> <암태도> 같은 소설은 그동안 읽어 왔던 <폭풍의 언덕>이나 <좁은 문> <데미안> 같은 류와는 또 다른 감동을 주었다. 물론 한길사나 동녘, 실천문학사 같은 출판사에서도 좋은 책을 출간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당대의 문학과 사회를 아우르는 저항의 아이콘은 창비였다.

 그에 비해 문학 쪽은 문학과지성사(문지)를 꼽았다. 나는 문지에서 나온 이청준이나 조세희·최인훈의 소설과 황동규·김명인·황지우·이성복 시인의 시들을 읽었다. 시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문학동아리에 들어 화요일마다 성모다방에서 시를 놓고 동인들과 토론을 벌였다.

 어느 시인의 말마따나 우리의 젊은 날엔 '창비가 있었고 문지가 있었다'. 그리고 창비 영인본이 있었다. 80년대 대학가에선 서적 외판원들이 벤치나 빈 강의실에서 팜플렛을 들고 열심히 전집이나 사전류를 팔았다. 그때 외판원들이 많이 팔았던 책이 브리태니커 백과사전과 삼성출판사의 세계사상전집, 그리고 창비 영인본이다. 그 시절 창비 영인본은 대학생 필독서 비슷하게 많이 읽히던 터라 나도 3학년인가 4학년 때 용돈을 모아 한 질 구입했다. 검정 하드보드지에 금박으로 글씨를 새긴 두꺼운 책들인데, 책장에 꽂아놓고 보니 책 두께만큼이나 뿌듯했다.

 하지만 영인본과의 인연은 오래 가지 못했다. 졸업을 하고는 타지에서 직장생활을 했고, 결혼 후엔 단칸 신혼방이 책장을 놓기엔 비좁은 터라 친정에 두고 온 것이다. 나중에 집을 마련하고 책장을 들일 여유가 생겼을 땐 오빠에게 미안해서 가져올 수 없었다. 애서가인 큰오빠가 책장의 좋은 위치에 창비신서들과 영인본을 꽂아두고 애지중지 했던 것이다. 아쉽지만 오빠에게 선물한 셈치고 그대로 두기로 했다.

 이제 그 책들은 세상의 풍파에 유실돼 어느 곳에도 없다. 졸업을 하고, 직장을 잡고, 결혼을 하고, 이리저리 세상 속으로 뿔뿔이 흩어졌을 때 예견된 일인지도 모른다. 논술 관련 일을 하다 보니 창비에서 나온 아동 서적을 읽기도 하고, 삼국지 붐이 한창일 때는 황석영의 <삼국지>를 한 질 들여놓기도 하고, 지금도 간간 창비에서 나온 시집을 사서 읽지만 이전 같은 감흥이나 열정은 이제 없다. 무엇보다 출판도 자본의 논리를 따르다 보니 책의 종류나 출판문화도 많이 달라졌다. 그래도 창비는 창비라고 출판 소식이 들려올 땐 가장 먼저 찾아보는 편이다.

 그런데 이번에 소설가 신경숙의 표절 사건이 터졌다. 소설가 이응준이 1996년 창비에서 나온 신경숙의 <전설>이 일본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과 일부 문단이 흡사하다고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두 문단은 너무 비슷해서 변명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신경숙은 '자신은 그 소설을 읽은 적이 없으며, 진실여부에 관계없이 이런 논쟁은 작가에게 상처를 주기 때문에 대응하지 않겠다'라고 말을 한 뒤 침묵을 지켰다.

 이후 여론의 뭇매를 맞자, <우국>을 읽은 기억은 안 나지만 문장을 비교해보니 표절이란 문제제기를 하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마지못해 미온적인 사과를 했다. 창비는 신경숙의 첫 해명 이후 곧바로, 인용 장면이 작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아서 표절로 보기는 어렵다는 논리로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가 독자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치자 '지적된 일부 문장들에 대해 표절의 혐의를 충분히 제기할 법하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역시 표절이라고 명백히 시인은 하지 않은 채 공론에 부치겠다고만 하고 침묵 중이다.

 그 소식을 접했을 때 처음 들었던 느낌은 비애감이다. 한때 사랑했던 사람의 좋지 않은 후일담을 듣는 것 같은 씁쓸함과 안타까움. 물론 대형 출판사들이 작가와 평론가, 자신들끼리의 카르텔로 뭉쳐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고, 특히 문단 권력의 정점에서 창비가 초심을 잃었다는 얘기는 지속적으로 들어왔던 터다. 하지만 막상 그것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확인할 때의 참담함이란! 창비와 문지를 통과의례처럼 거치며 어른이 되었지만, 이제 창비의 추문을 들으며 우리는 늙어가는 것일까. 내년이면 창비도 50살이다. 꼰대와 어르신의 갈림길에 창비가 서 있다. 아아,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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