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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람 향긋한 풀향기 풍기던 춘풍초향(春風草香) 삼,사,오뉴월도 낮 하지(夏至)를 통해 사라지더니 '첩 팔아 부채 산다'는 여름이다. 녹색과 함께 찾아오는 불볕더위 염천(炎天)계절이 밤 동지(冬至)를 향해 첫발걸음을 내딛는 7월이다. 매년 그렇지만 녹색과 염천은 결실을 위한 쌍미(雙美)로 더해 간다.

    녹색의 중심에 벼가 있다. 동·식물은 먹어야 산다. 먹이는 생명체의 원동력 보충이다. 사람은 탄수화물이 필요하다. 벼는 쌀이며 밥의 재료이면서 탄수화물 함양이 높다. 밥이 연상되는 이유는 삶에있어 그 만큼 중요하고 소중함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밥 먹고합시다' '다 먹고 살자고하는 일인데' '배고파 못살겠다' 등의 표현은 밥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밥은 의식에도 중요한 헌물로 나타난다. 매일 불전에 올리는 '마지', 죽은 자의 반함(飯含), 망자의 '메' 모두 밥이다. 그런가하면 '까치밥'이라해 감나무에 몇 개 남겨 두는가 하면 무정물인 시계까지도 '시계 밥 주라'한다. 

 밥은 인간이 품종개량한 녹색의 보물 벼가 생산한 쌀이다. '천석군, 만석군'도 쌀이요, '고방에서 인심난다'는 말의 의미도 쌀이다. 굶주려 죽을 지언정 결코 후손을 위해 남겨둔다는 신주단지에 보관하는 씨나락도 쌀이다. 이렇듯 소중한 것도 가까이 있어 그 가치를 망각할 때가 있다. 가뭄과 마른장마가 이어지는 요즈음 농부는 자식같은 벼포기가 말라가는 모양을 차마볼 수 없어 집에서도 논에서도 안절부절하고 있다.   

 벼농사는 손이 많이 간다. 어떤이는 쌀 미(米)를 파자해 농부의 여든 여덟 번의 수고로움에서 밥이 입으로 들어온다고 말한다. 어디 여든 여덟 번뿐이겠는가. 한해 농사짓는 농부의 까맣게 탄 속내가 있어야 백미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울산은 예부터 쌀이 풍족했다. 농소들, 관상들, 임암들, 삼산들, 삼평들, 강양들 등 들녘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는 동천, 태화강, 외황강, 회야강 등 강이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가까운 들녘에는 그동안 가뭄과 마른장마로 고생한 노랑모가 몇 번 스치고 지난간 단비에 이제 겨우 살림을 내렸는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 싱그러움을 날로 더해 가고 있다.

 '이 모깡에 모를 심어 언제 환성할꼬' 사라져가는 울산의 모찌기 민요의 일부이다.

 달포 전만하더라도 난 낮이면 통풍시켜주고 밤이면 잠자리 보살펴주는 친정 못자리 방석에서 응석부리기에 하루 해가 짧았다. 뒷동산 뻐꾹새 첫 울음울던 어느날 아버지는 논두렁에 걸터앉아 영문을 알 수 없는 '보낼 때가 이제 됐다, 보낼 때가 이제 됐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며칠후 난 모판을 떠나 이앙기를 탔다. '탈탈'거리는 이앙기 소리를 벽제삼아 낯설은 들녘으로 나아갔다. 그곳은 고르게 써래질한 넓은 논으로 일생을 보낼 곳이였다. 바람없고 손없는 날 이앙기는 몇시간을 공들여 나를 가지런히 줄세우며 물논에 살며시 내려 주었다. 새끼제비 입속같이 노랗고 키작은 보잘 것 없는 나는 그렇게 살림을 시작했다.

 뒤돌아보면 이앙기 탄날 '물길랑 청청 헐어놓고 주인네 양반 어디갔노' 이장의 구성진 노랫가락에 온 동네는 잔치였다. 그 복도 잠시였다. 물길로 철철 흘러 넘치던 세월도 열흘 남짓하더니 그 후로 가뭄들어 살림은 졸아들어 거북등을 만들었다. 진펄에 천방지축 뛰던 개구리도 키 작은 내 머리 위로 이리저리 뛰어 떠나버렸다. 지성이면 감천일까. 가뭄과 마른장마는 농부의 마음을 아침 저녁으로 애태우더니 지난 몇 번의 단비에 노랑모도 이제 '점순이' 키 만큼 커져 황로가 목을 움츠리지 않아도 숨을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

 새로운 환경에 낯설어 살림이 서툴땐 논두룸에 기어다니는 매꽃일지라도 부러움의 대상이 됐던 나였다. 앞으로 이대로만 자란다면 개망초를 내려다보고 이야기할 날도 멀지 않았다. 가뭄의 가난으로 '점순이'같이 붙배기 키에 모로만 벌어지는 몸이 될까 아침 저녁으로 내심 걱정했던 농부는 처정청 넘치는 물에 이제야 흙 묻은 손을 씻는다. 말없던 농부는 먼산 뻐꾸기 울음이 포곡(布穀)아닌 부국(富國)으로 들리는지 '허참 고놈 뻐꾸기 초성 한번 좋구나' 헛기침하며 먼산으로 고개 돌린다. 장마 끝난 들녘에 황로, 백로, 왜가리가 온 종일 땡볕에 김매기하고, 제비는 날개 접을 일 없이 해충 잡이에 여념이 없다. 농부는 생각하는 머리보다 실천하는 몸으로 논에 땀을 뿌려야 진정한 농사꾼이라 말한다.

 '이달 크고 훗달 크면 칠 팔월에 환성한다'는 믿음 속에 하늘 높이 날아 올라 '캑캑캑' 거드럼 피우는 파랑새를 보며 하루 보낸다. 여름 녹색 들녘이 가을 황금물결 넘실거릴 그날을 향해 '모야 모야 노랑모야' 부디 회향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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