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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이사

휴가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오래전 광고의 카피만으로 배낭을 만지작거리던 직장인이 열심히 일하지 않았어도 떠날 수 있는 휴가의 계절이다. 뭐 좀 덜 열심히 살았으면 어떠랴. 이번 여름 완전히 비우고 이제 다시 시작하면 되는 거다. 스스로 위안하며 여행 사이트를 뒤적거린다.

    정치권에서는 내수진작을 구호로 '휴가를 국내에서'라고 외치지만 웹사이트 웬만한 곳은 이미 숙박 예약이 되지 않는다. 이상한 일이다. 뉴스에서는 제주의 많은 숙박업계가 손님이 없어 울상이라는데 여행 사이트는 매진이다. 항공편은 더하다. 아예 휴가철에는 제주행 항공편은 저가항공까지 꽉 찼다. 정치권의 외침과 호소는 현상을 이야기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숙박업계나 관광업계의 선물량 확보 후 선택적 판매의 특별한 소비유통 구조가 지배하고 있다. 쉽게 이야기해서 업계에서 항공권이나 숙박권을 대체로 선물로 잡아놓고 있어 일반 국민들이 스스로 예약하는데 어려움이 있다는 이야기다.

 정치권이 외치는 정책성 홍보문구와 현실의 괴리는 비단 이런 경우만이 아니다. 민생경제를 외치거나 지방살리기를 외치는 정치권은 가끔 시장을 둘러보고 악수하고 물건 몇 개 사주는 홍보에 치중하지만 그들이 떠난 자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한산한 저자거리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문제는 정치가 그렇지 뭐라고 툭 던지는 한마디가 고착화되는데 있다. 국민이 정치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슬쩍 곁눈질로, 아니면 외면하고 있기에 자조와 푸념이 일반화 되고 있다. 정치인들은 툭 하면 '국민이 정치를 걱정하게 해서 고개를 들 수 없다'고 이야기 하지만 천만에, 국민은 이제 정치를 걱정조차 하지 않는다. 걱정해주는 시기는 애정이 깔려있는 끈끈한 관계일 때 가능하다. '뭐, 그렇지'하며 외면하는 뒷모습은 애정이 떠난 싸늘한 냉기가 흐르는 자리다.

 휴가 이야기를 하다 뜬금없이 정치 이야기를 풀어놓는 이유는 하나다. 느슨하게 풀어놓고 내려놓아야 할 여름 휴가철에 우리 정치는 또다시 칼을 갈고 맞서고 날을 세운다. 뉴스를 보지 않고 정치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되겠지만 대한민국 오지마을까지 깔린 미디어 인프라는 국민을 정치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지 않는다. '거부권' 정국으로 팽팽하던 정치권은 이제 '해킹 정국'으로 새로운 라운드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국정원과 안철수가 맞섰다. 신당설과 탈당설이 뒤죽박죽이 된 야당에겐 더 없이 좋은 기회다. 그런데 안철수의 표정이 좀 달라졌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전군후퇴를 외치며 개구리 타법을 구사하던 안철수가 이번에는 '전국민이 도청과 도촬을 당했다고 생각해 봐라'며 비장한 표정으로 날을 세운다.

 안철수의 눈빛이 변한 건 타이밍을 잡았다는 그의 감 때문일지 모른다. 절정의 순간 마지막 한방이 부족하다는 핸디캡을 드디어 날릴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는 표정이다. 어제는 단독으로 기자회견도 열었다. 뉴스의 초점이 되는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나. 문재인도 힘을 실어줬다. 이제는 정치적 라이벌이라기 보단 그저 하나의 지원군 정도로 생각하니 문재인이 안철수를 바라보는 눈빛도 따듯해 보이기까지 한다. '국민정보지키기위원회'라는 간판을 주고 위원장을 맡겼다.

 그러자 안철수는 외친다. "국가의 역할은 국민의 정보 인권을 최대한 보장하면서 국가의 안위를 지키는 것"이라며 "우리 모두가 한 약속을 국가가 지켰는지 확인하고자 이 일을 시작했다"며 국정원의 해킹프로그램 구입 논란을 국민의 정보 인권 문제로 공론화하겠다고 포문을 열었다.

 글로벌 시대에 국가 정보기관의 역할은 엄청나다. 대한민국처럼 분단의 상황이거나 미국과 중국의 이해관계가 갈린 경계에 선 지정학적 특수성까지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문제는 우리의 정보기관이 그동안 보여준 왜곡된 정보취합과 활용이다. 정보기관을 상대로 속살까지 드러내게 하는 우리의 현실은 분명 낯부끄러운 일이지만 일정부분 정부의 책임도 있다. 그러니 야당이 웃통을 벗어던지고 덤빌 태세다. 하지만 요란을 떨 일은 아니다. 감청이나 도촬은 굳이 이탈리아산 해킹 프로그램까지 동원하지 않아도 충분하다. 용산 전자상가에 가면 오만가지 장비가 줄을 섰고, 지금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다. 그런 현실에서 20개의 해킹 프로그램을 구입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정색을 하면 그건 호들갑이다.

 우리를 안타깝게 하는 건 언제나 타이밍을 제대로 못 잡는 안철수다. 정치판에 기생하는 낡은 벌레들을 쏙아내 정치판을 청소하겠다는 이상주의자의 눈빛은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 보인다. 문득 지난 주말 중고서점에서 만난, 할인에 재고 정리에 이제 땡처리 되는 '안철수의 생각'을 보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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