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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소설가

1974년 6월 28일. 그 날은 현대 창업주 故 정주영 회장의 혼으로 건조된 26만 톤급 유조선 애틀란틱배런호 진수식이 있었다. 배 이름은 육영수 여사가 지었고 선주는 그리스 선박 회사였다. 나는 그 날 중계방송 PD로 울산MBC 이광주 아나운서 부장과 함께 전국에 현장을 알리면서 그 분위기를 샅샅이 볼 수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 내외와 국내외 귀빈이 대거 참석한 대규모 행사에 대한 중계방송에 참여하게 된 것도 영광스러웠거니와 그보다는 그 날의 모습들이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감격스러움으로 울렁거리는 가슴을 지체할 수 없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1971년까지만 해도 한국의 연간 선박 건조량은 50만 톤이 총 톤수였고 그마저 목선(木船) 건조량을 모두 합한 것이었다. 이런 나라에서 철선으로 26만 톤급 유조선을 만들고 진수식을 가졌으니 세계가 놀라고 심지어 이웃 일본의 선박 전문가들이 기껏해야 5만 톤을 넘지 않는다고 했던 말이 무색해지는 일이어서 시샘으로 아마 쇼를 벌이는 모양이라는 헛소리를 궁시렁 댈 판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그 날은 대한민국이 승천하던 날이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그런데 그 승천의 조종간을 쥐었던 정주영 회장의 불굴의 의지와 지칠 줄 모르는 도전정신을 만에 하나라도 새길 수 있는 오늘의 중공업 노동조합이라면 요즈음과 같이 슬픈 현상을 보이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 서글픔을 느끼게 된다.

 잡초만이 우거져 있던 허허벌판 백사장 미포만을 찾아온 정주영 회장은 세계 최고의 조선소를 짓는다는 웅지를 품으며 그 정경을 사진에 담았다. 그 미포만의 사진과 5만분의 1 지도 한 장, 그리고 스코트리스고우에서 만든 26만 9,000톤급 유조선의 설계도면을 챙긴 정주영 회장은 곧 복음을 전하기 위해 고행을 떠나는 사도처럼 세계의 조선 관계자를 만나러 나섰다. 가난한 조국에 조선소를 세워 가난을 물리치겠다는 굳은 신념하나로 고행길을 떠났던 것이다. 참을 수 없는 냉대와 핀잔을 쓴 약처럼 삼키면서 개의치 않고 달리기만을 계속했다. 시중에 회자되는 거북선이 새겨진 지폐를 내밀었다는 웃지 못할 얘기 등 수많은 일화는 이때에 경험한 일이었다. 지구 저편 밤낮이 바뀌는 곳에서도 촌각을 아끼기 위해 새우잠으로 뛰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던가! 드디어 인연이 닿았다. 당시 그리스 선박업계를 쥐락펴락하던 요르거스리바노스는 정 회장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반신반의 하는 리바노스는 정 회장을 물러서게 할 양으로 당시 국제선가보다 16%나 싼 헐값으로 계약서에 싸인 하면서 배 인도기간과 기간 내 배를 인도치 못할 때는 원리금을 전액 배상한다는 조항을 연필로 그으며 강조했다.

 세상 어느 누구라도 날인하지 않았을 계약서에 정 회장은 '좋소!'하고 서명을 해버렸다. 선가(船價)는 선가라 치더라도 26만 톤급 유조선을 2년6개월 만에 진수한다는 것은 그때까지 있지도 않았고 있을 수도 없다고 여기던 때였다. 실로 기적 같은 신화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고 나서 울산으로 달려온 정 회장은 본격적인 신화 만들기에 돌입했다. 조선소 건립과 26만 톤급 유조선 건조작업을 동시에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도 초인적인 능력으로 감당하면서 신화를 남겼던 것이다. 진수식 날, 중앙의 기자들이 둘러싼 속을 나는 헤집고 들어갔었다. 청와대 출입 기자였던 이득열 앵커 기자가 특유의 또박또박한 소리로 질문을 했다.

 "어떻게 그런 악조건에 날인을 했습니까?"

    "예, 여기있는 선주 측에도 어제 얘기 했습니다만 나는 자신이 있었어요. 남들이 일할 때는 우리도 일하고 남들이 잘 때도 우리는 일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정 회장의 대답이었다. 기자들도 혀를 내둘렀다. 중공업 출입기자였던 나는 잠시 그때를 회상하면서 정 회장이 늘 강조하던 말을 기억해본다.

 "담담한 마음을 가지고 생각하는 시간을 가집시다. 나라가 잘 돼야 회사가 잘 되고, 회사가 잘 돼야 개인이 잘됩니다."

 그렇다. 답답한 마음으로 중공업 노조에 전하고 싶다. 40년 전 대형선박을 만들었던 근로자들, 바로 여러분 선배들은 지금도 증언하고 있다. 몸이 아파도 아프다 말 하기 싫었고, 밥 먹고 물을 마실 시간이 없었다. 회장님이 먼저 현장에 달려가 망치를 들고 작업을 돕고 있으니까. 그뿐인가. 화장실에서 변을 보고 휴지를 들고 뒷감당할 시간조차 없었다. 참으로 눈물겨운 추억담이다. 이런 신화들이 오늘의 중공업을 만들고 이런 열정의 애사심이 오늘날 노조원들의 일터를 만들었다.

    회사의 경영상 적자가 누적돼 지극히 어려운 처지에 임원을 무더기로 해고하면서 회사를 일으켜 세우려 안간힘을 다하는 처지에 또 타 기업에 비해 고임금을 받으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임금을 요구한다면 이건 누가 들어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적자가 누적되고 있는 회사에, 거기다 인사권까지 내놓으라면서 파업으로 몰고 있다니, 도대체 이게 될 말인가? 이 시간 영면에 계신 정주영 회장의 간곡한 충언이 들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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