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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게 세 가지 행운이 한꺼번에 찾아왔다.
 하나는 쇼핑몰에서 중학생 아들의 워킹화를 주문했는데 착오가 있었는지 주문한 것보다 몇 갑절은 비싼 워킹화가 배송됐다. 그야말로 삐까번쩍한 것이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아들은 내가 없는 사이에 택배 박스를 뜯어 신고 학원엘 가버렸고, 그 덕분에 그 워킹화는 껌 값에 아들 것이 되었다. 요즘 말로 득템이다.
 또 하나는, 퇴근 후 친정 엄마께 다녀올 요량으로 마트에 들렀더니 마침 경품 추첨 중. 그러라지 뭐. 갈치 몇 마리를 사고 카드를 내밀고 계산을 하는 순간 요란한 팡파레와 함께 내가 경품에 당첨됐다.
 이럴 수가. 나는 가위바위보에서도 이기는 일이 잘 없는 사람인데 경품에 당첨되다니! 얼떨결에 상품으로 받은 것은 파란색 플라스틱 대야였다. 속에 갈치를 담고 촌아낙네처럼 머리에 이고 주차장까지 걷는데 흥흥흥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나머지 하나는 학교에서의 일. 수업을 마치고 교실을 나오는데 1학년 3반 선생님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지퍼백에 담긴 것은 쌀보리였다. 쌀보리는 (보리의 한 계통으로 겉보리와 구분해 부르는 명칭. 보리의 꽃은 속껍질과 겉껍질에 싸여 있으며 꽃이 수정되면 씨방이 비대하여 씨알이 된다. 이 씨방이 속껍질과 겉껍질이 잘 떨어지는 특성을 가진 보리가 쌀보리) 선생님의 남편이 농사지어서 판매하는 것인데 맛 보라며 일부러 출근 길에 갖고 온 것이었다.
 두 손으로 받아들긴 했지만 얼마나 난감했는지 모른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뒤로 지금은 농사를 짓지 않지만 나는 여전히 농부의 딸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농사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벼농사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안다. 자고 나면 논에 가 엎드리고, 먹고 나면 밭에 가 엎드려 땅보고 절하는 농부 절값이라는 박방희 시인의 시처럼 쌀과 보리는 농부의 절값이고 땀값이다.
 그 귀한 쌀보리를 거리낌 없이 내미는 손길에 눈물이 났다. 그 동안 나는 드린 것도 없거니와, 애써 지은 곡식을 주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잘 알기에 열 살 아래인 선생님 앞에서 눈물을 보일 뻔했다.


 아들의 운동화와 플라스틱 대야와 쌀보리를 번갈아 보면서 행운이라는 단어를 생각한다. 두 가지 일은 행운이라고 한다면 쌀보리를 전해주는 그 손길은 행운일까, 행복일까, 아니면 다른 이름의 그 무엇일까.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상가에는 소문난 복권 명당이 있다. 1등 당첨자가 8명이나 된단다. 나는 그게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잘 모른다. 다만 길게 드리운 현수막 글자를 읽다가 민망해서 얼른 눈길을 거둘 뿐이다. 낮에도 가게를 들락거리는 사람이 많지만 토요일 오후가 되면 길게 줄을 선다. 비장한 얼굴을 하고 가게로 들어갔다가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은 장엄하기까지 하다.
 복권 당첨자의 사례를 조사해 보았더니 하루아침에 덜컥 당첨된 경우는 없었다고 한다. 재미로, 혹은 간밤 꿈이 좋아서 혹시 하고 사서는 절대 당첨되지 않는다고 한다. 조사에 따르면 평균 2~3년 동안 꾸준히 복권을 샀거나, 일정 기간 동안 정성을 기울인 사람이 당첨되더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결국 행운이다. 단 2~3년을 투자해 그 정도 벌어들인다면 그것도 어차피 행운 아닌가. 그 행운 뒤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크고 작은 절망과 좌절이 있을까.


 아들이 운동화를 신고 홍길동처럼 축지법을 쓰듯 학교를 겅중겅중 걸어다니니 행복하고, 펑퍼짐한 대야에 걸레나 운동화를 세제 풀어 넣고 담가 둘 수 있어서 행복하고, 아무 것도 드리지 못한 나에게 쌀보리 한 봉지 꽃 같은 마음으로 내미는 사람을 만난 것도 행복이다.
 행운을 기다리는 일은 피곤하다. 또 행운이라는 말은 창틀에 잠시 앉았다 가는 비둘기처럼 짧기만 하니 행복이라는 말에 가둬두기로 한다. 행운으로 행복하다면 나는 행운을 만난 것이 아니라 행복을 만난 것이므로. 하하, 오늘도 나는 행복하였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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