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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도 팔순이 넘은 노모와 환갑을 바라보는 아들이 입씨름을 했다. 요즘은 별것도 아닌 것을 놓고 모자가 진지한 자세로 한바탕 입씨름을 벌이는 일이 종종 있다. 어머니와의 다툼은 시간이 흐르면서 방향타를 잃어버린 목선처럼 갈팡질팡 하다 평온을 찾는다.

 어머니는 젊을 때 보다 나이가 들면서 아들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아졌다. 해거름 때부터 아들이 퇴근해서 오는지를 6층 아파트 창가에서 지켜보고 있다. 가끔은 어머니 눈에 뜨이지 않게 집에 들어가서 창문을 내다보고 있는 어머니를 놀라게 하면 오늘은 일찍 와서 마음이 놓인다면서 목이 멘다.

 아들은 어머니의 기다림이 때로는 걱정이다. 기다리지 말라고 해도 어머니는 들은 척을 하지 않는다. 막무가내식이다. 양말을 벗어놓으면 아내가 처리할 새도 없이 손수 세탁을 하고 있다. 다리가 아파서 끌고 다니듯 하면서도 유독 아들 것은 두고 보지 못한다. 몇 년 전에만 해도 그것이 집착처럼 보여서 나무라기도 하다가 근래는 아예 어머니의 뜻대로 하게 해준다. 그것이 어머니를 편하게 해 드리는 일이기도 해서다.

 엊그제는 새벽시장에 가서 땅콩을 한가마니 사왔다. 아파트 뒤뜰에 하루정도 바람을 쐬었다가 베란다에 펴놓고 틈틈이 까고 있다. 땅콩 한가마니는 부피가 많다. 베란다가 넘칠 정도여서 하루빨리 까치워야 할 것 같아서 아내와 나는 연속극을 보면서도 매일 저녁 땅콩을 깠다. 어머니는 손목이 아파서 매일 쑥뜸을 하고 있다. 당연히 땅콩을 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우리 부부가 출근하고 난 뒤 아픈 손목으로 땅콩을 깠다. 저녁에 퇴근해서 보니 마룻바닥에 어머니가 깐 땅콩들이 빈틈없이 누워서 마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픈 손목으로 땅콩을 깐 이유를 물었더니 어머니는 미리 답을 정해놓은 문제지를 푸는 것처럼 "애비가 아파서 걱정인데 아픈 사람이 땅콩을 까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서 하루종일 땅콩을 깠더니 저녁에는 손목이 돌아가지 않는다"고 하면서 웃었다.

 어릴 적에도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남달랐다. 그 때는 내 나이 또래들이 집집마다 많았다. 또래들이 야생적 자람이라면 나는 양육적 자람이었다. 모두들 초근목피의 삶을 이어가던 때라서 사방공사로 근근이 입에 풀칠을 했다. 일반 가정은 양육을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다. 아이는 낳아놓으면 스스로 자라는 시대였다. 육아에서 야생과 양육 두 가지만 존재하던 시절 어머니는 과감하게 양육을 선택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릴적 나의 모든 것이 어머니의 통제권 안에 있었다. 통제권 밖에서 놀기 위해서는 어쩔 수없이 밤이면 들고양이처럼 어머니의 눈을 피해야 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으로 고등학교 진학을 할 때까지 어머니와 나의 숨바꼭질은 계속됐다.

 중학교 2학년 때 여드름이 나면서 이성에 대한 관심이 높을 때였고 우리 마을 여자 친구의 도움으로 초등학교가 다른 마을의 여학생과 소위 연애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수학 자습서가 편지를 담아 나르는 우편배달부 가방역할을 했다. 자습서를 주고받던 어느 날 그 여자 친구가 우리 마을로 놀러온다는 것이었다. 저녁을 먹고 우리는 냇가로 마실을 나갔다.

 이슬이 질펀하게 내리도록 놀았다. 그때는 아무 의미없는 이야기도 "까르르 까르르" 여학생들의 숨 넘어가는 웃음이 왜 그리 재미있었는지. 그 시간 집에서는 난리가 났다. 어머니가 나를 찾다가 이웃한 외가에 가서 외할머니에게 내가 없어졌다고 한 것이다. 그러자 외할머니도 나를 찾아 나섰다. 밤 새워서 마을을 뒤져 나를 찾았다. 여학생 앞에서 우쭐대고 싶었던 나의 자존심이 마마보이로 전락해버리는 순간의 창피함은 말할 수 없는 청소년기의 상처가 됐다. 그런 날들이 산골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계속됐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야 겨우 어머니의 감시를 벗어날 수 있었다. 하늘을 날아갈 듯 홀가분했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데도 누구 한 사람 감시하지 않았다. 산골에서 부산 대도시로 온 후 나는 한껏 자유를 누렸다. 이런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러나 1978년 5월 현대자동차에 입사하면서 어머니와 같이 살게 됐고 나의 대 자유는 거기서 끝이 났다.  

 환갑이 다 된 지금도 어머니의 감시는 끝나지 않았다. 아침에 출근하면 뒤 베란다에서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나를 지켜보고 있다. 뒷꼭지가 근질하다 싶어서 아파트를 올려다보면 어김없이 어머니의 눈과 마주친다. 주차장에서 차를 운전해서 나갈 때까지 지켜보고 있다. 어머니의 끝나지 않는 사랑에 지금은 손을 흔들면서 같이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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