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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명체는 태어난다. 생성은 반드시 소멸한다. 사람은 오래 살기를 바라지만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차례의 생노병사 자연의 섭리에는 어쩔 수 없다. '사람 안 죽은 아랫목 없다'는 말이 있듯이 집집마다 죽은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무릇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빠름과 늦음의 차는 있어도 반드시 죽는다는 생자필멸(生者必滅)은 자연의 법칙이다. '소여(小輿) 대여(大輿)에 죽어 가는 것이 헌옷 입고 볕에 앉았는 것만 못하다'는 말은 죽어서 꽃상여에 누워 북망산천 가는 것보다 비록 남루한 옷을 입고 앉아 살아있는 것이 좋다는 비유이다.

 서산대사는 삶과 죽음을 한점 구름이 생기고 흩어지는 것으로 '생야일편부운기(生也一片浮雲起) 사야일편부운멸(死也一片浮雲滅)'로 읊었다. 또 죽음의 종착역이 어디냐는 물음에 대해 무릇 모든 생명체는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간다는 생어토귀어토(生於土歸於土)라는 말도 있다. 불교 <장례의범>에서는 산골하면서 '환귀본토진언(還歸本土眞言)'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시편>에는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146:4)라고 해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창세기 2:19)의 말씀을 뒷받침하고 있다. <무상게(無常偈)>에는 죽으면 '머리털과 손톱과 이빨과 살점과 뼈와 골수들은 모두 흙으로 돌아간다'는 개귀어지(皆歸於地)로 더 상세히 표현하고 있다.

 장례법에는 땅에 묻는 매장, 물에 던지는 수장, 불로 태우는 화장, 독수리 먹이로 주는 조장 등 나라와 민족에 따라 그 문화가 다르다. 우리나라의 경우 매장문화가 절대적이었으나 최근에는 화장 비율이 점차 증가해 매장보다 앞선 추세라고 한다. 또한 최근 장례문화에 있어서도 일반적인 3일장이 2일장으로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간소한 장례문화의 변천은 핵가족·장례비용 등 현대적 가족 구성과 경제적 여유와도 무관하지 않다. 일본에는 이미 1일장이 일반화됐다고 한다. 더 큰 이유는 독신자의 삶에서 돌볼 상주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이제 몇 년 지나지 않아 장례문화도 일탈문화에서 일상문화로, 3일장에서 1일장으로 자리매김 할 날이 올 것 같다.

 문화재청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는 2014년 12월 발굴한 고려시대 고분인 전북 순창 농소고분 관곽(棺槨)의 목관에서 금가루로 쓴 고대 인도문자인 범자 300여 자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그 가운데 관 측면에는 현재도 한국불교 재의식에서 병법(秉法)되는 부처 가르침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참말'인 '육자진언(六子眞言)'과 '파지옥진언(破地獄眞言)' 등 2종이 반복돼 적혀있다고 한다. 이 육자진언과 파지옥진언에 대해 부언하면, 먼저 육자진언은 현재 불교의범에서는 '육자대명왕진언(六字大明王眞言)'으로 사용이다. 여섯 자로 된 진언으로 밝고 밝음을 부각하는 '옴 마 니 파 드메 훔(Om ma ni pa dme hum)'이다.

 '불교사전(운허용하, 1997)'에는 라마교의 보전(寶典)인 <마니캄붐>의 무량광불이 대자대비한 성관음을 칭찬하는 말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옴은 제천(諸天), 마는 아수라, 니는 인간, 반은 축생(畜生), 메는 아귀(餓鬼), 훔은 지옥의 문을 닫는 다는 의미를 각각 지닌다. 결국 성관음에 의해 천상, 아수라, 인간, 축생, 아귀, 지옥의 육도를 벗어나 한편으로는 보리를 구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중생을 교화하여 너와 내가 함께 부처가 되자는 상구보리 하화중생 자타일시성불도의 진언인 것이다.

 파지옥진언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는 진언이다. '옴까라데야스바하'(Om ka ra de ya sva ha)이며 보통 '옴 가라지야 사바하'로 한다. 불교의식과 저녁 종성에서 '문종성번뇌단 지혜장보리생 이지옥출삼계 원성불도중생'하고 이어서 뒤에 한다. 목관에 육자잔언과 파지옥진언이 반복적으로 쓰여진 것은 망자의 극락왕생을 바라는 염원과 삿된 잡귀로부터의 주검의 보호하고자하는 염원에의해 쓰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관 속에 큰 새의 깃털을 넣어주는 것은 새가 되어 훨훨 날아가라는 의미이며, 입에 쌀과 옥 그리고 돈을 머금게하는 반함(飯含)도 저승 가면서 배고픔을 면하고, 노잣돈으로 쓰라는 복합적 필요성에 의해 나타난다.

 길을 가다보면 가끔 영구차를 만나게된다. 또한 로트킬 당한 짐승 사체를 보게도 된다. 그때마다 불길하다는 식으로 고개를 돌리거나 '퉤 퉤 퉤'한다. 어리석은 행동이다. 나도 언젠가는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제부터라도 앞서간 죽음의 소식과 주검을 접하게 되면 '원왕생'이나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를 염송하길 권하고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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