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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어떤 일을 하다가 생각 따위를 다른 데로 돌릴 수 있는 시간적 여유'라고 나와 있다. 비슷한 말로 '틈'이 있다. 틈을 다시 찾아보면 '어떤 행동을 할 만한 기회나 겨를'이라고 되어 있다. 겨를은 보통 '없다' 같은 부정어와 결합된다.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손 쓸 겨를이 없다. 말릴 겨를이 없다와 같은 말들이 그 예다. 이것은 각각 신경 쓸 틈이 없다. 손 쓸 틈이 없다. 말릴 틈이 없다로 바꿔 써도 무방하다.

    틈이란 공간적으론 벌어져 사이가 난 자리, 갈라진 흠을 말하고, 시간적으로는 자투리 시간과 같은 잠시의 여유를 말하니 공간적으로든 시간적으로든 허술함과 헐렁함을 뜻한다 할 것이다. 한가로움, 여유, 여백이 생각난다. 이것은 겨를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겨를이 없다니, 잠시의 여유나 머뭇거림도 허용하기 어렵다는 것 아닌가.

 과학이 발달하면서 생활은 점점 편리해졌지만 한가함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전기밥솥을 쓰고 세탁기나 청소기를 돌려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시간이 줄어들었을 텐데, 그렇게 줄어든 시간이 한가함이나 여유로움으로 연결되지 않고 쉴 겨를이 없고 숨 돌릴 틈이 없이 세상은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 요즘 들어서는 여러 가지 겨를 없는 와중에 궁금할 겨를도 없는 것 같다. 모든 것이 SNS를 통해 유포되고, 실시간으로 반응이 돌아오기 때문이다.

 '궁금함' 하면 생각나는 일이 있다. 대학교 3학년 겨울에 동아리 선배 한 명이, 사촌동생이 얼마 전 제대를 했는데 썩 괜찮은 사람이라며 소개팅을 주선했다. 겨울방학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이듬해 복학을 앞둔 그 사촌동생이 충주에서 대전까지 나를 만나러 왔다. 전경으로 제대했다는 말을 듣고 나는 만나기 전부터 거부감을 갖고 있었는데, 큰 키에 잘생긴 데다, 유쾌함과 진중함을 두루 갖추고, 대화까지 잘 통하여 거부감은 이내 호감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주소를 교환하고 헤어진 뒤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에게서 편지가 오고 내가 답신을 한 것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다시 답장이 오지 않았다. 아니, 사귀자는 의중의 편지를 먼저 보내놓고 답장을 하지 않다니, 나는 자타가 공인하는 편지 실력을 갖고 있어서 중·고등학교 때 위문편지 답장도 거의 매번 받았던 터인데, 대체 어느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은 걸까? 처음엔 화가 났다가 계속 답장이 늦어지자 대체 무슨 일인지 애가 타고 궁금증이 났다. 선배에게 전화해서 물어보자니 자존심이 상해서, 석 달 가까운 겨울 방학을 대문만 바라보며 지냈다.

 이듬 해 개강 후에 선배를 만나 자초지종을 들은 뒤 나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사촌동생은 제대 전 후임을 폭행한 것이 문제가 되어 대전에서 돌아오자마자 끌려갔고, 아마 내 답장은 읽지도 못했을 거라는 거였다. 폭력을 휘둘렀다는 말에 그동안의 호감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게 벌써 30년 전 일인데, 지금 같으면 카톡이나 문자로 상황을 재빨리 설명하고, 나는 궁금증이 생길 겨를도 없이 감정이 정리되었을 것이다. 

 요즘은 소개팅 전이라도 사진을 미리 주고받아 상대방의 얼굴이 궁금할 겨를이 없다. 그날 나는 보문산 입구에서 약속한 빨간 목도리를 두르고 과연 어떤 사람이 올까 두근거리며 서 있었는데 말이다. 소개팅이 성사되더라도 이젠 카톡을 이용해 실시간으로 대화를 나눈다. 밤 새워 편지를 쓰고, 답장을 기다리며 대문을 들락거리던 일은 아득히 먼 세대의 일이 되고 말았다. 조카가 태어나도 이내 사진이 전송되어 온다. 페이스 북을 통해 오래전 친구들의 소식도 웬만하면 듣고 알 수 있다. 궁금할 겨를이 없는 것이다.

 궁금함은 설렘을 동반한다.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으면 설렘의 감정은 좀 더 오래 지속된다. 요즘은 대부분의 궁금증이 즉각적으로 해결되다 보니 설렘의 감정이 예전만큼 크지 않은 것 같다. 거의 유일한 설렘이 택배가 오기를 기다리는 게 아닐까 할 정도이니 말이다. 그러다보니 가끔 궁금함이 좀 더 오래 지속될 수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호기심이 빠르게 충족되는 것은 좋지만, 빠른 만족은 또 다른 불만족을 낳는다. 판도라의 상자에서 빠져나온 것들은 다시 상자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열린 상자의 밑바닥에 남은 것은 희망이 아니라 공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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