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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서늘한 바람이 분다. 계절을 사람보다 먼저 아는 꽃이 있다. 시골집 모퉁이에 훤칠하게 핀 해바라기다. 초가을 햇살을 받아 노란빛이 더욱 짙어간다. 늘 바깥을 내다보고 서 있는 둥글둥글한 해바라기를 보니 저 꽃을 닮은 어머님이 얼비친다.

 시어머님은 아버님을 일찍 여의고 오직 아들만 바라보며 사셨다. 아들이 도회지로 나간 후 부터는 기다리는 나날이 되었다. 아들을 한 주일만 못 봐도 애를 태웠다. 주말 오후만 되면 해바라기가 돼 담장 밑을 서성거렸다. 숨이 턱턱 막히는 한 여름의 불볕더위에도 세상길이 눈으로 막혀버린 엄동에도 아랑곳 하지 않았다.

 담장 앞에 나와 먼데 눈길을 주고 서서 하마 아들이 올까 싶어 기다렸다. 하루해가 설핏 기울려갈 때쯤 저 아랫마을 입구에 아들이 올라오면 단걸음으로 쫓아 나갔다. 발이 땅에 붙을 사이도 없이 종종걸음이었다. 아들의 가방을 덥석 받아들고 마당으로 들어서는 어머님의 얼굴에는 붉은 빛을 머금었다. 아들이 온 날이면 발걸음은 바퀴라도 단 듯이 빨랐었다. 치맛자락을 곧게 찌르고 아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기에 바빴다.

 어쩌다 아들이 오지 않는 주말이면 맥없는 얼굴로 수심이 가득했다. 긴 하루해가 다 기울여가면, 마당으로 들어서는 어머님의 모습은 담장 위에서 목을 꺾은 해바라기였다. 허구한 날 목을 빼고 기다려서일까. 야윈 체구에 해바라기처럼 목이 길었다. 

 내가 시집을 온 뒤부터 차차 마음의 여유를 조금씩 가지셨다. 어머니는 아랫사람에게 자별했다. 여름 밤이면 마당에 넓은 멍석을 깔았다. 모깃불을 피워놓고 잘 익은 옥수수를 한소쿠리 안겨주고는 손부채 일렁거리며 마을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었다.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간간이 추임새를 넣으면 신이 나서 맛깔스럽게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때 하늘을 쳐다보면 맑은 물로 헹구어 낸듯한 초롱한 별들이 쏟아져 내렸다. 그렇게 어머님의 생에도 별처럼 밝고 다복한 날도 있었다.

 되짚어 보면 시어머님은 고달픈 삶을 살아왔다. 일찍이 혼자가 된 어머님도 한 여자였다. 한번 시들면 다시 못 피울 인생인데 새 울고 졌던 꽃이 다시 필 때에는 새 길도 걷고 싶지 않았으랴. 그렇지만 세상 여자들이 그렇듯이 자식들을 두고 그런 마음을 비치기는 쉽지 않았을 게다. 여러 남매를 키우기 위해 험한 일도 마다 할 수가 없었다. 산에 올라 땔나무를 해야 했다. 나무가 반짐이고 눈물이 반짐이었다. 나물을 뜯어 허기를 달래도 아들만은 쌀밥을 따로 지어 먹었다. 

 해바라기를 태양의 꽃 또 황금의 꽃이라 부른다. 태풍에도 꺾이지 않고 가뭄도 견뎌내어, 솟대 같은 대궁 끝에 희망을 피워 올린 꽃이기 때문이다. 여름 내내 뜨거운 태양만을 생명같이 바라보는 꽃, 마지막엔 한 톨의 씨앗까지 남김없이 다 비우고 생을 마감하는 해바라기.

 시어머님도 기력이 많이 쇠약해 졌을 때에는 너희 눈에 뜨거운 눈물 빼는 게 아까워 죽을 수도 없다고 하였다. 세상의 어머님들이 모두 그러하겠지만, 특히 어머님은 우리 부부에게만은 애정이 남 달랐다. 그렇게 많고 많던 염려도 접었는지 잊었는지 다 내려놓고 가진 것 하나 없이 청산을 가셨다. 그런 마음을 어느 아들 며느리가 다 헤아릴까 만은 남편은 가끔 어린 날의 회상에 젖어들면 숨이 멎은 것처럼 한참동안 가뭇없이 앉아 있기도 한다.

 해바라기의 일생도 마지막에 가슴에 품은 씨앗을 다 쏟아버리고 벌집처럼 구멍이 숭숭 뚫어진다. 후 불면 날려갈듯 만지면 바스라 질듯 버썩거린다. 색깔조차 변하여 거무스레하다. 어머님의 가슴도 저리하였을 것이다. 자식을 위해 정신적인 배려와 물질까지 다 주고 남아 있는 것은 속이 검은 빈껍데기. 어찌 해바라기와 같지 않으랴. 

 성묘를 하고 시골집에 들렸더니, 어머님은 보이지 않고 담장 밑에 해바라기만 줄을 지어 피웠다. 마치 어머님처럼 목을 길게 빼고 서서 우리 부부를 마중이라도 하는 듯하다. "야야 덥제, 어서 들어와서 등물부터 해라."  어머님의 목소리가 귓전에 울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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