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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작가

가난한 친정보다 가을 산에 먹을 것이 더 많다는 말이 있다. 이맘때면 씨 뿌리지 않은 산에 먹을 것이 가득하니 그 말이 꼭 맞다. 산을 오르는 노고만 있으면 만날 수 있는 초대형 자연 마트. 어느 누가 찾아가도 후하게 대접하는 가을 산 인심은 변함이 없네.

 추석 다음 날 아버지 산소에 가 보니 정말 그랬다. 산밤나무에 알밤이 툭툭, 아버지보다 더 오래 산 상수리나무에서 도토리가 갈색 눈알을 굴리고 있다. 가을 냉이는 순하디 순해서 호미질이 필요 없다. 가을 산은 선물 세트 그 자체였다. 하지만 황금 들판을 바라보며 집으로 오는 길에는 감사와 기쁨이 사라지고 허전함이 밀려왔다.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신 이듬해부터 벼농사를 그만 두었다. 주말마다 짬짬이 시간을 내어 농사를 거들던 남동생도 회사 일이 바빠져 더는 농사짓기가 어려워졌다. 하필 엄마도 관절염이 심해 거동이 힘들어졌다. 고민 끝에 논을 부치기로 했다.

 처음에는 좋았다. 모내기한다고 와서 도와라, 타작하는데 왜 오질 않느냐는 성화가 없어서 편했고, 엄마가 고생하시는 것을 보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한 해를 그렇게 나고 보니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손해란 쌀 몇 가마니가 아니었다. 겨울이 가고 해가 바뀌었을 때 나는 논에서 아무런 추억도 얻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장 남의 논이 된 것도 아닌데 남이 짓는 아버지의 논에 발걸음 하기가 꺼려졌다. 가을에는 메뚜기를 잡느라 논두렁과 논둑을 헤집고 다녔는데 부치는 사람 눈치가 보여서 그러지도 못했다. 아끼는 가족 사진 한 장을 잃어버린 듯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건강하게 자란 벼들이 논과 논의 경계를 가려도 아버지의 논은 먼 데서도 정확하게 가늠이 되었다. 어디쯤에서 동생의 회사 점퍼를 입고 농약 이름이 적힌 모자를 쓴 아버지가 벼들의 물결 속에서 일어날 것 같아서 한참을 서 있었다. 

 유년 시절,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아무도 없으면 무조건 논으로 가면 그 곳에 아버지가 계셨다. 어른이 되어 아들 딸 손 잡고 친정 나들이를 했을 적에도 아버지가 집에 계시지 않아 논으로 달려가면 그 곳에 계셨다. 내가 생각지 못한 곳에서, 혹은 모르는 낯선 곳에 계셔서 나를 기다리게 한 적도, 외롭게 놔둔 적도 없었다. 해가 져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날에는 저수지에 빠져 돌아가셨나 싶어 마중을 가면 어둠 속에서 아버지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핑 눈물이 돌았다. 아버지는 마중 나온 선물로 방아깨비를 손바닥에 놓아주시곤 했다.

 엄마도 세 곳의 밭 중 두 곳을 묵히고 집에서 가까운 밭 한 곳만 일구게 되었다. 지팡이가 없으면 혼자 힘으로는 두 발짝도 내딛지 못해서 요즘은 전동차를 몰고 들로 나가신다. 재작년에는 고구마와 감자 심기를 포기했고, 올해는 고추 농사를 포기했지만 밭 하나만은 포기하지 못하셨다. 바로 자식 때문이었다. 밭에서 기어다니다시피 해도 친정 오는 딸들 손에 밭에서 나는 채소를 주고 싶어서 안달하셨다. 어쩌다 밭에서 수확한 것이 적을 때는 죄라도 지은 듯 미안함을 감추지 못하셨다.

 엄마가 싸주신 채소들을 기쁘게 들고 도시로 돌아왔지만 모두 음식이 되지는 못했다. 냉장고에서 묵혀 버려지는 것도 있었고 마트에서 사온 더 달콤하고 고소한 것에 밀려나기도 했다. 다른 이에게 논을 부친다고는 하지만 엄마는 내가 쌀을 팔아먹게 하지 않으셨다. 어디서 났는지 쌀독에 쌀이 떨어질 즈음이면 손수 현미를 찧어 놓고 나를 불렀다.

 며칠 전 어떤 자리에서 나는 농부의 딸이라고 말했다. 나도 모르게 그 말이 툭 튀어나왔다. 말하고 보니 내가 정말 아직도 농부의 딸인가 생각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계셨던 논두렁과 논 한 가운데 어디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오시던 어둑어둑하던 그 길, 아버지가 잡아오신 방아깨비 한 마리가 내 기억 속에 여전히 팔딱대고, 마른 옥수수대 사이로 시들어가는 양대콩 덩굴이 엎드려 있는 밭에 엄마가 앉아있는 그림이 가슴에 있고, 약간의 치매 증세가 있지만 밭에서 뽑은 열무로 김치를 담궈주는 엄마가 있으니 나는 여전히 농부의 딸이다.

 시간이 흘러 엄마마저 돌아가시고, 어찌어찌하여 시골집마저 허물어지고, 더 이상 아버지의 발바닥으로 다져진 논길을 걷지 못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농부의 딸이다. 제 아무리 세월의 힘이 세다하더라도 세월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진 추억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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