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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세상에는 소설 같은 인생을 사는 이가 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주위 사람의 마음이 안타깝다. 한 친구는 이십 대 중반에 아픔을 겪었다. 한 점의 혈육도 남기지 않은 채 그야말로 혈혈단신이다. 아무도 보아 주는 이 없는 외진 담장모퉁이에 핀 박꽃 같은 생을 살아가고 있다.

 친구들이 모이면 좋은 짝을 찾으라고 입방아를 찧어도 묵묵부답이다. 꽃도 한철이라 조건 좋은 자리를 들고 와서 제의해도 소귀에 경 읽기다. 남편은 오직 한 사람뿐이라는 것이 그녀의 지론이다. 후세에 가서 못다 한 생을 다시 살아 볼 것이라는 말만 한다. 이구동성으로 이십 대에 간 남편이 어찌 할머니가 된 너를 알아보겠느냐고 떠들어 댄다. 못 알아보면 그때 재혼을 하겠다고 한다. 죽어서 남편을 만나면 말하고 싶은 것은 투명한 삶을 살다가 왔다는 그 한 가지라고 한다.

 무엇이 저렇게 저 친구를 꽁꽁 동여매고 있을까. 그 또한 사람인데 물오른 춘삼월의 나무처럼 싱싱한 한때가 없지 않았다. 황갈색 사리가 함초롱에 소복이 담긴 봉숭아도 건드리기만 하면 터진다. 하물며 사람인데 왜 터지려는 열정이 없었겠는가. 홀로 삭히고 삭혀서 젊음의 혈을 망각해 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에 준하여 어느 누가 한 길가에 열녀문을 세워 줄 것이며, 박꽃 같은 순결함을 누가 무엇으로 보상해 줄 것인가.

 한번은 그럴만한 자리가 있어서 끌다시피 맞선을 보게 했다. 상대가 그 친구와 잘 맞을 것 같아 마련한 자리였다. 그러나 차 한 잔 마시는데도 손을 덜덜 떨다가 삽살개에게 쫓기는 닭처럼 도망치듯 달아났다. 먼저 간 남편이 속상해할까 봐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진정한 홀로서기도 너무나 어려울 것인데, 바보라 해도 할 수 없고 멍청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사랑한 남편을 보낸 아픔이 지천명이 넘도록 삭지 않고 아직도 속불 같이 가슴에 은은하게 남아 있어서일까. 그 정은 무슨 정이기에 강산이 몇 번이나 바뀌어도 식지도 않는지. 아니면 꽃다운 스물둘에 만나서 환영만 남기고 훌쩍 가버린 사람이 야속해서 너 없이도 살 수 있다고 평생 시위라도 하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외골수든 벅수든 세월을 비껴갈 수는 없다. 그녀 역시 불그스레하던 얼굴에도, 토끼가 물 먹고 간 옹달샘같이 해맑던 눈가에도 지금은 한여름 풀 먹인 모시옷처럼 자글자글해지고 있다. 초가을 집 담장 귀퉁이에 박꽃 한 송이가 가냘프게 피어 있다. 동색들은 다 지고 없는데 세상의 온갖 고난을 혼자 겪은 채 꽃잎도 생기가 없이 떨고 있는 것을 보니 영락없는 그 친구의 얼굴이 겹쳐진다. 

 이 길고도 넓은 담장을 혼자 책임진 것처럼 찬바람, 이슬 속에서 바들바들 피어있는 박꽃이 애처롭기 그지없다. 더불어 피지 않고 혼자 피어 아름답기보다는 세상의 고뇌를 다 짊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찬바람을 이겨내며 독불장군 같이 피었다고 좋아할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의복도 철이 있고 음식 또한 철에 맞는 음식이 있듯, 꽃 또한 철에 맞게 피어야 바람직하지 하다.


 친구 역시 꽃 피던 봄날을 다 보내고 처연히 핀 박꽃과 같다. 세상의 소리에 귀 막고 꼿꼿한 자세로 흔들리지 않는다. 넝쿨에 붙어있는 솜털처럼 어느 때라도 아무도 달려들지 못하게 뾰족한 기를 모은다. 자기만의 몸을 지키기 위하여 경계를 하며 순결을 지키는 비결이 아닐까 싶다. 박꽃에는 희한하게 벌 나비들이 오지 않는다. 해가 질 무렵부터 밤에만 피어서 그런지. 나비가 제집으로 찾아든 뒤라 몰라서 아니 올까. 티 하나 없는 순백이어서 감이 넘보지 못해서 안 오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담장에는 긴 막대들이 듬성듬성 엮어져 있다. 막대 사이로 말라가는 박 넝쿨이 휘휘 감겼다. 내년 여름이 되면 넝쿨들은 이 자리에서 어김없이 꽃망울이 맺혀 크고 작은 박들을 매달고 뭇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으리라. 아침에는 수줍은 듯 고개조차 들지 못하다가 저녁나절에 청순가련할 만큼 하얗게 피어날 것이다. 꽃들은 더 넓은 세상이 보고 싶어 담장 너머로 곡선미 예쁜 목을 길게 빼고 하염없이 내려다보고 있으리라.

    우리 사람들도 저 꽃과 같이 피었다가 지고 다시 피면 아무런 여한도 없으리라. 그러면 친구도 평생을 하루 같이 기다리지도 않고 일 년만 기다리면 그리운 사람을 만나지 않았을까. 오직 외길 같은 삶, 아니 '박꽃' 같은 색깔만 가슴 속에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이 측은지심이 든다. 꼿꼿하게 외길로 걸어간다. 남자들만 대하면 벌벌 떤다. 이것이야말로 이 시대를 혼자 살아내는 처세술인 것 같다. 어쩌면 이런 점이 소신껏 살아가는 그녀만의 독특한 트라우마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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