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씁쓸했다. '아드레날린'이 치솟는 듯도 했다. 지켜보는 사이 말초까지 전해졌던 불쾌지수는 '막장드라마'에 버금갔다. 얼마 전 울산시에서 열린 시립미술관 주민설명회 얘기다. 주민설명회라기 보다는 '이전투구'의 산교육장에 가까웠다.

 원도심을 대표해 왔다는 주민들은 하나 같이 미술관을 원했다. 그들은 미술관이 죽은 상권을 회복시켜 줄 '구원투수'라 했다. 죽 쑤는 갤러리 운영에 반전을 가져다 줄 '최후의 보루'라고도 했다. 그래서 미술관 입지가 거론될 때 이미 원도심으로 옮겨왔노라 목소리를 높였다. 당초 미술관 예정지에서 발견된 객사터의 가치나 미술관 정체성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그들은 미술관을 시장자본 논리에 걸어 잠궈버렸다. 그 자리에서 문화융성이니 문화 경쟁력이니 하는 말은 해괴한 수사에 불과했다.

 물론 모든 인간은 생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설명회에 참석해 수십년간 예술계에 몸담아왔다 외쳐대는 그들도 마찬가지다.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에 의하면 인간은 어차피 '생존 기계'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이 본질이다. 그러면서도 예술만은 이 시대에 마지막 성역이기를 꿈꾸는 것이 우리 인간이다. 그래서 미술관을 '상권활성화'와 묶어 단순계산하려하는 그들의 외침은 공허했다.

 언제부터 미술관이 관람객 지갑을 열게하거나 갤러리 수익을 올려주는 '미끼'였던가. 미술관은 '전시·비평'의 장이다. 100년 후에도 미술관 풍경은 지켜져야한다. 그러기 위해선 자기보호에 충실한 것과 탐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그들이 먼저 깨달아야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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