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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울산 초등학교 터에서 조선시대 울산도호부 객사인 '학성관' 등 주요 시설물의 유구가 발굴됨에 따라 얼마전 김기현 울산시장은 객사인 학성관을 복원할 뜻을 밝혔다. 그동안 필자는 현 시립미술관(울산초) 입지의 부적절성과 관아구역 복원을 주장해 왔기에 이번 시장의 뜻을 전폭적으로 지지한다.

 이번에 발굴된 유구는 관련법에 따라 건축물 등을 복원할 때까지 온전히 보존해야 한다. 그러나 유구 보존이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폭우 등에 훼손될 우려도 있고, 보존에 애를 써도 보기 흉하기 십상이다. 게다가 발굴된 '적심'이나 '주춧돌'만으로는 고고학적인 의미 외에 이 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보여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경주황룡사 9층 목탑의 주춧돌이나 처용전설이 어린 울주군 청량면 율리 망해사의 주춧돌을 본 적이 있는가. 객사 등의 중요성을 애써 외면한 채 초석도 없는 적심(초석 밑에 까는 다짐돌 무더기)만 보존한다는 것은 울산의 자존심에 상처를 내는 일이며 울산도시 역사에 대한 모욕이다.

 건축은 형태와 공간의 예술이다. 더구나 문화재급 건축물 복원은 예술적 가치나 역사 구현 이상의 의의가 있다. 관아구역 중 우월적 지위를 가진 핵심시설은 동헌이 아니라 객사다. 객사의 위치와 형태, 그 속에서 행해진 행위를 볼 때 이것이 분명해 진다. 울산 관아구역에서 학성관의 장소적 위치는 기본적으로 경복궁의 근정전과 같다.

 객사의 형태는 중앙부가 솟을 지붕으로 높고 좌우익사(숙소)가 낮게 붙어 있는 남향 일자집이다. 일반적으로 객사를 타지에서 온 관리들의 숙소로만 알고 있으나, 숙소는 부차적 기능을 담당했다. 선조들은 객사의 솟을 지붕 아래 전청(殿廳)에는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안치해 삭망(매달 초하루, 보름)에 고을 수령이 '향궐망배(向闕望拜)'하는 지엄한 공간으로 사용했다. 수령에게 객사는 임금을 대리하여 행정, 사법, 군권 등 수령칠사(守令七事)를 수행하는 한편 임금을 가까이 모신 듯 목민관의 소임을 다할 것을 다짐하는 전각이었다.

    또 하나, 특별한 기관인 '유향소(留鄕所)'에 대하여 언급하고자 한다. 유향소는 군현의 수령의 독선과 부패를 견제하기 위해 설치하는 것으로 덕망있는 지방 유지들로 하여금 자율적으로 규약을 만들고 운영하게 하여 수령 업무의 문제점을 상부(도 관찰사나 중앙의 경재소)에 보고하도록 했다. 오늘날 지방의회와 유사한 기능이 조선에도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 울산시에서도 고려하고 있겠지만 객사 복원 시 학성관의 정문인 남문루(진남루)에 대해서도 그 활용 방안에 대해 고심해봐야 한다. 울산관아의 시각적 상징은 학성관의 정문인 남문루(진남루)다. 남문루는 현재 남구 신정동 이휴정에 옮겨져 있으니 본래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남문루가 없으면 관아구역을 구획하는 전통 담장을 조영 할 수 없다.

 관아구역 복원은 단순히 건축물을 복원하는 것이 아니다. 근대 조선이 500년이란 세계 유래가 없는 장기 왕조가 가능했던 저력의 역사의 일면을 울산관아에서 볼수 있기 때문이다. 객사, 남문루와 유향소 등 울산관아를 복원하여 울산도시역사의 산교육의 장으로 활용하여야 한다. 그러나 울산관아를 복원하려면 울산읍성 일부라도 복원하지 않으면 안된다. 읍성과 관아는 한 몸이기 때문이다.

 울산읍성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 연재한다. 일제강점기 일본인에 의해 허물어진 학성관이 울산 시민의 손으로 복원되는 날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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