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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아버지는 왜 생년월일이 실제와 달라요?"

 자신들이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생일 선물을 준비하던 아들에게 종종 들었던 말이다. 양력을 쓰는 세대라 음력 생일을 기억하는 것만 해도 헷갈리는 아이들이다. 그래서 양력으로 환산을 하더니 실제보다 4개월여의 차이가 나는 엄마의 생일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베이비 붐 세대 전후 10여년 안팎의 사람들 중 호적과 실제 생년월일이 다른 경우는 꽤 많다. 영양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은 산모에게서 태어난 신생아들의 생존율이 그만큼 낮았다는 슬픈 입증이다.

 "그러면 혹시 죽을지도 몰라서 출생신고를 안 했다는 거예요?"

 경악을 금할 수가 없다는 물음 앞에 비로소 억울했다. 필자도 혹시 죽을지도 몰랐던 아기였다는 자각에 씁쓸했다.

 얼마 전 문제가 된 새끼 돌고래 폐사 사건이 필자의 출생 당시를 떠올리게 했다. 남구도시관리공단이 운영하는 장생포 고래생태체험관에서는 고래가 태어나면 낙동강유역환경청에 신고를 하게 되어 있다. 일종의 고래 출생신고인 셈이다.

 그런데 죽은 새끼 돌고래들은 출생신고조차 되지 않은 생명들이었다. 그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을 굳이 문제 삼을 필요가 없었던 것일까? 출생신고도 되지 않은 채 죽은 신생아들이 거적에 싸여서 버려졌던 사실과 자꾸만 겹쳐진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건강상의 이유로 목숨을 잃을 수가 있다. 어떤 경우든 죽음은 슬픔과 맞닿아 있다. 개인의 경우 슬픔이나 아픔을 주위에 알리고 싶지 않을 때도 있다. 누구의 위로도 스스로에게 위안이 되지 않는 경우나, 크고 작은 치부를 드러내기 싫어서 사실을 말하고 싶지 않은 경우다. 그런 경우에는 어떤 책임론도 따르지 않는다. 거기에 왈가왈부할 사람도 없다.

 책임이 뒤따르는 경우는 다르다. 그것이 공공의 관심을 받는 기관의 경우라면 사건의 전말에 관한 한 특히 투명해야 한다. 최근 불거진 남구도시관리공단의 '새끼 돌고래 폐사' 사건은 이런 지적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다. 지면을 통해서 알게 된 사건은 의심만 증폭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기관의 무책임이 책임회피로까지 확대된 까닭이다.

 관리자의 관리 소홀이든, 돌고래의 건강상 문제였든 사실을 숨겨왔다는 것은 결코 간과할 문제는 아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나 이어진 사고를 은폐했다는 것만으로도 뭔가 켕기는 점이 있음을 인정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 

 어디든 크고 작은 사고가 없는 경우는 드물다. 다만 그 사실을 수습하는 과정이 문제다. 외부에서 알까 봐 쉬쉬해서는 문제를 키우기 십상이다. 알려야 할 사실을 숨기려고 한다는 것은 어딘가 켕기는 면이 있음을 시인하는 결과일 뿐이다. 새끼 돌고래 폐사 사건은 시민들이 알 권리가 있다. 굳이 고래박물관을 방문하지 않더라도 고래에 대한 친근한 이미지를 감안한다면 무조건 덮으려고만 해서는 안 된다. 사실을 제대로 알렸더라면 비난이나 비판의 수위도 적정선 이상으로 올라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남구도시관리공단의 사건 무마는 의혹만 눈덩이처럼 키우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설령 돌고래의 죽음이 최선을 다한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고 해도 믿지 못하게 된 것이다. 공단 스스로 이미 관리 소홀임을 부정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떳떳한 일이 아닐수록 빨리 인정하기, 투명한 수습과정을 보이기가 원활하고 성숙한 사건처리 자세다. 이처럼 당연한 사실을 외면함으로써 공단을 향한 비난의 화살을 피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새끼 돌고래의 죽음 자체가 시민들의 삶에 큰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시민들이 흥분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돌고래는 공공예산으로 사 들인 시민들의 자산이다. 그럼에도 관리 소홀로 문제를 일으키고, 그것을 숨기려다가 들통이 났다는 사실이 여론을 들끓게 하는 것이다. 가로등, 쓰레기통, 벽화 속에서 만나는 울산의 고래. 고래도시 울산. 고래특구 남구란 이름과 걸맞은 풍경이다. 부디 성숙한 처리로 시민들의 실망감을 잠재우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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