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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처용문화제가 50년을 맞는다. 울산하면 굴뚝 도시였던 대표 단어가 이제는 고래나 반구대암각화, 태화강에 영남알프스까지 다양화 됐지만 여전히 울산은 처용의 고장이다. 처용문화제라는 이름도 처용의 출발이 바로 우리 고장이기 때문이다. 처용문화제의 시작을 알리는 개막전 의식이 진행되는 처용암은 울산의 역사성을 말해주는 중요한 지역이다. 오늘날의 용어로 국제무역항인 개운포가 신라의 수도 서라벌과 인접해 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고려는 수도 개경 인근에 벽란도라는 국제항이 있었고 조선 역시 서울 인근에 제물포가 있었다. 항구는 교류의 현장이자 이질적 문화가 혼재하는 다양성의 마당이다. 오늘의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옛날 사람들의 국제교류는 그 폭이 넓었다.

 이 같은 증거는 우리보다 오히려 아랍쪽에 그 자료가 많이 남아 있다. 아랍의 유명한 지도제작자 알 이드리시가 1154년에 그린 지도에 '실라'라는 이름이 뚜렷하게 기재되어 있고 그 위치 등이 밝혀져 있다. 사라센제국의 전성기에 신라와 교역이 이루어짐으로써 신라가 이슬람문화권에 알려졌다는 증거다. 중세 아랍 무슬림 학자들은 자신의 견문이나 연구 및 기타 여행가들로부터의 전문 등을 토대로 신라에 관한 여러 가지 정보를 놀라울 정도로 정확히 기술했다. 1,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국제무역항 개운포는 이제 문화제의 서막을 여는 초라한 포구로 전락했지만 이렇듯 과거에는 세계에 신라를 알리는 교류의 출발지였다. 물론 문화제는 과거 문화의 편린을 주워담는 의식이 아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다문화시대의 축제의 장으로서 처용문화제가 갖는 의미를 짚어 나갈 수 있다. 국제무역항인 개운포의 역동성과 다양한 문화가 교류되는 무한한 포용력이 천년왕국 신라의 힘이었듯 그 문화의 '메타포'였던 처용의 내재된 관용과 느림의 힘을 새롭게 해석하는 '변용의 과정'이 문화제의 진정한 의미라 할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처용이 갖는 본질적 의미를 찾아야 한다. 처용은 누가 뭐라해도 벽사의 상징이자 민간 발원의 표상이다. 관용과 화해, 평화의 상징이기도 한 이 처용을 오늘의 시각에서 축제의 상징물로 사용한다면 이는 당연히 '벽사'의 의미로 해석하고 '발원'의 총합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 옳다. '벽사'는 무엇인가. 축제는 지역민의 화합을 이끌어 내고 지역민의 발원과 기복을 담아내는 어울림의 장이다. 처용 탈을 집집마다 걸어둔 이유는 재앙으로부터 가정을 지키려는 선조들의 발복의식이었다. 그 '벽사'의 발원이 응축된 처용을 오늘에 계승하는 것 역시 본질을 훼손해서는 안된다.

 그 중요한 예로 과거 처용설화와 그 이야기에서 우리는 많은 콘텐츠를 찾아낼 수 있다. 처용설화에 의하면 신라시대 민간에서는 처용가를 부르고 처용탈을 걸어 역신을 쫓아내려고 했다. 여기서 역신이란 전염병을 의미하기도하고 광의적으로는 재앙을 의미하기도 한다. 처용의 이 설화로 인해 민간에서는 처용의 얼굴을 문에 붙여 한해의 병을 피하고자 하였고, 제웅 혹은 처용이라고 하여 짚으로 인형을 만들어 길에 버려 액을 막았다. 궁중에서는 섣달그믐날 처용의 얼굴을 한 탈을 쓰고 처용무를 추는 나례(儺禮)를 행함으로써 나쁜 기운을 막고 전염병을 쫓고자 하였다. 관아에서도 매년 한해를 시작하기 전 처용탈을 쓰고 처용무를 추는 것을 의례로 하였다. 이것이 바로 '벽사'의식의 중요한 증좌다.

 50년을 맞은 처용문화제가 전면적인 개편을 해야하는 이유는 이 지점에서 분명해진다. 처용문화제의 본질과 다른 방향으로 흐르는 모든 콘텐츠는 배제하고 별도 행사로 진행하는 것이 맞다. 처용문화제는 처용의 벽사의식이 시민들의 발복과 기원의 축제로 승화될 수 있도록 본질에 충실한 행사로 거듭나야 한다.

 마침 오늘이 정월 대보름이다. 상원절이라 부르는 정월대보름에 우리 선조들은 잡귀를 물리치고 복을 불러들이는 벽사진경( 辟邪進慶 ) 의식으로 가정과 마을의 안녕을 축원했다. 우리나라 전체 세시풍속의 20%가량이 대보름날을 맞아 치러지는 이유도 바로 한해의 시작과 벽사진경의 의식이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신라 때 사람들은 아침에는 오곡밥을 지어 복을 나누고 낮 동안 지신밟기로 한해의 액운을 쫓아내고 풍년을 기원하다 저녁에 대보름달이 솟아오르면 '쥐불놀이'로 액막이를 했다. 그 중심에는 처용탈이 있었고 탈바가지를 집집마다 걸어 벽사의 액막이를 기도했다. 이만한 콘텐츠가 우리나라 어디에 있을까 싶은 대목이다. 그 정신을 살린 처용문화제가 50년을 계기로 완전히 변화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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