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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정월 대보름달은 구름이 끼어서 볼 수 없다는 뉴스를 몇 번 들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대보름날 저녁 숟가락을 놓자마자 승용차에 아내를 태우고 몽돌이 아름다운 정자해변으로 달려갔다.

 내 기대와는 달리 찾아간 정자 해변은 달맞이 하는 사람들 대신 파도가 포말을 일으키며 몽돌해변으로 몰려왔다 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해안선을 따라 기다랗게 펼쳐진 몽돌 밭 어디에도 달집살이 불꽃이 피어오르지 않았다.

 달을 볼 수 있던 예년의 정월 대보름날 정자해변은 낮부터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오늘도 달을 볼 수 있었다면 몽돌 밭은 한 여름 해수욕장 인파만큼 붐볐을 것이다. 정월 대보름 대목을 기다렸을 길거리 상인들만이 전등불을 밝혀놓고 스치듯 지나가는 차량들을 무신경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오륙 년 전, 정월 대보름날 아내와 나는 정자해변을 찾았다. 그때는 인근 마을 주민들이 달집을 지어놓고 한바탕 풍물놀이로 한해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놀이가 볼만했다. 달집을 두른 새끼줄에 소원을 적은 쪽지를 끼워놓고 즐거워하던 사람들이 몽돌해변을 가득 메웠었다.

 풍물놀이가 그치고 하늘을 치솟던 연기가 잦아들면서 마을사람들이 자리를 뜨자 아내는 달집살이 뒷불에 오징어를 올려놓았다.

 이글거리는 뒷불은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세기에 따라 화려한 불꽃으로 피었다가, 사그라졌다가했다. 나는 그 재미에 빠져서 바짓가랑이가 눌어붙는 줄도 몰랐다. 아내가 구워진 오징어를 꼬챙이로 밀어내는 것을 보고서야 깜짝 놀라 불에서 멀어졌지만 이미 바지는 오징어보다 더 꼬들꼬들해진 후였다.

 그날은 바람이 참 거세게 불었고 파도가 2~3미터로 높았다. 뒷불에 구운 오징어를 들고 아내와 인적이 뜸해진 몽돌 해변을 걸었다. 몽돌해변은 걷기가 생각보다 수월하지가 않았다. 발을 옮길 때마다 신이 몽돌 밭에 푹푹 빠졌고 작은 돌멩이와 모래가 자꾸 신안에 들어왔다.

 둘만의 오붓한 시간이었다. 그날은 단답형 대화로 해도 될 것을 연 꼬리처럼 길게 늘어뜨렸다. 그 덕분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식들에 대해서 그 때처럼 아내와 진지한 대화를 나눈 적은 많지 않다. 아내는 걸으면서 자식들이 대학을 졸업후 직장을 구하고 나면 둘이서 홀가분하게 해외로 여행을 떠나자고 했다. 여행경비를 모두 아내가 마련하겠다고 해서 내가 도리어 머쓱했었다.

 아내와 나는 해외여행을 계획해놓고 둥근 달을 보며 희망의 꿈을 꾸었다. 미래의 즐거운 여행을 위해 경비를 아껴야 한다는데 의견을 합해 커피도 자판기에서 뽑아 마셨다. 여태 이보다 맛있는 커피가 있었던가 싶었다.

 그때로부터 오륙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이다. 아내와 나는 그 꿈의 절반만 성공시키고 절반의 성공을 위해 살고 있다. 아직 한 놈이 남아서 취직시험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정월 대보름날은 어느 해 대보름날보다 그래서 의미를 더 가졌는지도 모른다. 올해는 아내와 오륙년 전 그때처럼 바스락 거리는 몽돌을 밟고 파도와 만나는 곳에서 달을 보고 우리 가족의 간절한 소원을 빌고 싶었다. 

 어둠이 안개처럼 깔린 해변, 달구경 왔다가 허탕 친 아내의 손을 잡고 등대처럼 불을 밝힌 레스토랑을 향해 걸었다. 레스토랑으로 가는 내내 바다는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바깥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실내가 포근했다. 아내는 분위기가 좋다며 조금 전의 달을 보지 못한 실망감에서 벗어나 아메리카노 커피와 함께 이름도 생소한 케이크를 주문했다.

 레스토랑은 빈자리가 많았다. 야경이 아름다운 창가 테이블을 골라서 앉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아내와 나는 과거로 돌아간 듯 또 오륙년 전의 그날처럼 대화를 시작했다. 약간 달라진 것이 그때 보다는 둘 다 흰 머리숱과 얼굴에 주름살이 늘었고 목소리에 힘이 빠진 것이었다. 서로 바라보는 눈길에서 안쓰러움이 느껴졌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물꼬를 텄다 싶었을 즈음 오륙년 전처럼 아내는 환갑이 지나서 둘이 해외여행을 떠나자고 했다. 그때를 위해서 충분히 비용을 마련해 놓겠다고 다짐하듯 했다. 내가 피식 웃었더니 웃을 일이 아니라면서 지금부터는 우리를 위해 살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아내의 태도가 너무 진지해서 웃음을 멈추었고 바로 쳐다보기가 미안해서 먼 곳의 불빛들을 응시하며 고개만 끄덕였다.

 5년 후 아내는 정년퇴직한다. 그때는 오늘 아내가 말한 약속이 지켜졌기를 희망한다. 그 때가서 내가 아내에게 다시 오륙년 후의 새 꿈을 이야기해 줄 수 있기를 작은 소망으로 가슴에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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