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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 동구
                                                                     서정주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백이 가락에
작년 것만 시방도 남았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디다


● 서정주 시인- 전라북도 고창 출생, 1936년 동아일보 '벽'으로 등단. 2000년 금관문화훈장, 대한민국 예술원상 등. 시집 '동천', '국화 옆에서' 등 펴냄.


미당이 제시한  선운사란 공간은 구도적 깨달음이 결코 멀리있는 것이 아닌, 사람들이 살비비고 살아가는 도처의 저자 거리에도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은유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동백이란 상징을 통해서 말이지요.
 면벽의 참선을 통해 불자들이 구도에 이르는 길만이 시쳇말로 진리 추구가 아닌 속세에서도 구도의 길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지요. 동백꽃을 찾아 나섰으나  시인의 눈엔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시간적, 공간적으로 설정한 선운사에서는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막걸릿집 주모의 육자배기 가락을 듣는 순간, 무릎을 치는  돈오의 깨달음을 얻는다는 진술이 아닐까도 싶습니다.
 얼핏 보면 철이 아직 일러 시인이 못보고 왔구나, 라고 볼 수도 있으나 뜻하지 않은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서 동백꽃의 현현을 갈파 했다고 시인은  고도의 진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토록 갈구하고 찾아헤맸던 그 심오한 진리가  서른 살 남짓, 저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이었구나 하는, 마치 오만진탕 뻘투성이 구정물에서 눈부신 연꽃을 건져 올리듯 합니다.
 비천한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서 작년 것만 시방도 남았다고… 작년에 피었다 떨어진 동백꽃이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쉰 목소리로  남아 있듯 말입니다. 윤회에 의해 맺고 푸는 인연을 말함이겠지요.
 많은 사람들이 해마다 이른 봄이면 동백꽃을 보러 가는지, 불공을 드리러 가는지 삼삼오오 관광버스에 몸을 싣고 선운사엘 갑니다.  이 봄 나는 소리소문없이 다녀올까 싶습니다. 동백꽃들이 결사항전하던 삼별초가 제 목을 툭 툭 쳐서 자결하듯,  단말마의 울음처럼  지기 전 춘삼월,  선운사 뒤란에서  혼자 흐득흐득 울다가 오고 싶습니다. 류윤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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