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편집이사 겸 국장

이외수가 '칼'이라는 소설을 들고 나왔을 때, 만화방은 무협소설 열풍이 불었다. 세상에 대항할 스스로의 힘이 없는 사내는 언제나 품 속에 칼을 쥐고 산다. 그가 무협을 읽었다면 칼을 버리고 음습한 굴 속에 들어가 전설의 구음진경을 독파했을지도 모르지만 소설 속의 그는 칼이 유일한 구원이었다.

    무협은 어른들의 판타지다. 현실의 무료함이 무기력으로 번질 때 무협은 위안을 준다. 흔히 무협을 두고 저질문학이라 칭하지만 어엿한 계보도 있다. 중국 청대 의협소설이 원조다. 무협의 주인공은 강한 자를 누르고 약자를 돕는 것을 덕목으로 삼는다. 핍박받는 민중을 위해서 무공으로 세상을 평정하는 대리만족이 부실한 어른들의 꿈으로 엮인 셈이다.

 지금 한창 벌어지는 정치판의 공천전쟁이 무협지 수준이다. 무협의 세계는 내공이 기본이다. 오랜 수련의 과정이 없다면 검을 잡지 않는 불문율이 존재하는 세계다. 그런데 20대 공천전쟁을 보고 있으면 무협지 비슷한 용어는 등장하지만 어쩐지 풋내가 난다. 계파간 신경전에 기싸움까지, 어쩌면 팔극권이나 육합대창 같은 신공의 무술을 본듯도 한데 이건 시장판에 잡배 수준의 패거리 싸움이 딱이다.

 무림의 현재 권력인 새누리가 4·13 대결전을 앞두고 대표 검객을 고르고 있다. 기존 검객들 중 수련이 부족하거나 배신했거나 사병을 키운자를 솎아내는데 혈안이다. 첫 학살의 신호탄은 울산이었다. 비박계 강길부 의원과 박대동 의원이 첫 학살자로 이름을 올렸다. 한쪽은 세월에 무운이 다했다는 명분으로 또다른 한쪽은 집안 단속을 못했다며 파문의 죄를 덮어 씌웠다.

 신호탄이 올라가자 학살자 명단은 장바닥에 뒹굴었다. 이종훈 조해진 류성걸 김희국 홍지만 권은희 이이재 등 유승민계 7인방이 4년 내공의 품새도 선보이지 못한채 파문됐고 경선에 올랐던 유승민계의 막내 민현주까지 청와대를 뒷배로 한 민경욱의 손기술에 주저앉았다. 이로써 유승민계 8인방은 몰락했다.

 학살의 최선봉에 선 자는 해방둥이 이한구다. 칠순을 넘긴 그가 눈빛에 살기가 넘치는 것은 매일 아침 신공을 전수 받았는다는 이야기도 있고 가문의 비책에 따라 기공을 연마한다는 이야기도 전설처럼 들리지만 확인할 방법은 없다. 날카롭다. 턱선이 역꼭짓점으로 향하는 인상은 민첩한 상이다.

    그가 상대할 자는 '무대' 김무성이다. 묵직한 인상에 호랑이 상인 무대를 상대하는데는 제격이다. 호랑이를 잡는 데는 예리한 검이 답이다. 묵직한 철환 따위로 덤비다간 훅, 한방에 가는 수가 있다. 그래서 이한구는 전술적 선택에 능하다. 유승민계나 비박계를 흔들다가 불쑥 친이계의 족보도 시장바닥에 뿌리기도 했다. 급기야 옛 친이계 좌장 이재오의 수염도 뽑아버렸다. 지난 무림의 수장이었던 MB의 오른팔 주호영까지 자르자 '무림계의 보복'이 발톱을 드러냈다고 야단이다.

 그래도 워낙 산발적이어서 대응할 틈이 없다. 친이계와 비박계를 툭 건드리다가 옛친박계 배신자들을 마른 북어 엮듯 후려치는 품새가 재빠르다. 진영이 반기를 들었다. 그가 누구인가. 한 때 현재의 권력에 핵심 본방으로 활약했던 그였지만 기초연금 대선 공약 수정에 반기를 들고 초유의 '항명 파동'으로 퇴진한 원조 친박계 인사다. 항명이 곧 죽음인 무림의 질서를 모를 리 없는 그가 살기 위해 선택한 곳은 더불어 살자고 '하여가'를 부르는 야권이다. 야권의 대리청정을 주도하는 김종인도 한 때는 친박의 밥그릇을 함께 나눴던 숟가락 동지 아닌가.

 이재오는 안되는 줄 알면서도 재심을 요구하고 유승민과 이한구는 누가 먼저 칼집에 손을 데는가에 온 신경이 쏠렸다. 애초부터 장바닥에서 일대일 검술본색을 겨뤄 선수를 선발하자는 무대는 포효도 못해보고 판을 응시할 뿐이다. 그가 선택한 마지막 한수인 '옥쇄 버티기'는 그저 버티기 수준일 뿐, 판을 뒤집을 신의 한수는 아니다. 사정이 이쯤되자 급한 쪽은 '무대'로 기우는 분위기다. 선발전을 마친 선수들은 결전의 명단에 붉은 띠를 둘러야 하는데 무대가 띠를 쥐고 놔주지 않는다며 대놓고 항명할 것은 자명하다. 딱 8년 전 무림 대결전의 복사판이다. 친이계가 도려낸 친박계는 후일을 도모하며 짐을 쌌다. 친박연대기의 스토리는 뻔한 결말이 됐지만 이번 학살의 결말은 구심점이 없어 변수가 많다.

 문제는 선발전에 철저히 배제된 이들이다. 정치가 패거리로 전락하고 내공이 술수에 농락당하는 자리에 보이지 않는 것은 국민이다. 정치는 분명 국민을 지향하고 있지만 삼류 무협지는 그저 시리즈를 가능한 길게 늘여 완판독자를 확보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을 뿐이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