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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들집

                                                                                                                 이영광

어쩌다 혈육이 모이면 반드시 혈압이 오르던 고향
원적지의 장터,
젓가락 장단 시들해진 버들집
아저씨 고향이 나한테 타향이지라
술 따르는 여자들은 다 전원주 같거나 어머니 같다 황이다
나는 걷고 걸어 지구가 저물어서야 돌아왔는데,
이미 취한 여자의 정신없는 몸에 어깨나 대어준다 황이다
더운 살이 흑흑 새어 들어와도
나는 안지 못하리라, 고향에서 연애하면 그건 다
근친상간(近親相姦)이리라
파경(破鏡)이리라
옛날 어른들이 돌아온 거 같네 얄궂어라
수양버들 두 그루가 파랗게 시드는 꿈결의 버들길
버들집은 니나노집
나는야 삼대,
어느 길고 주린 봄날의 아버지처럼 그 아버지처럼
질기고 어리석은 고독으로서
시간이, 떠돌이 개처럼 주둥이를 대다 가도록 놔둔다 황이다
고향을 미워하는 자는 길 위에 거꾸러지지 않고
돌아와, 어느새 그들이 되어 있는데
수양버들 두 그루는 아득한 옛날에 베어지고 없고
그 자리, 탯줄 같은 순대를 삶고 있는 국밥집
삼거리엔 폐업한 삼거리 슈퍼
보행기를 밀고 가는 석양의 늙은 여자는 어머니, 어머니,
하고 불러도, 귀먹어
돌아볼 줄 모른다

● 이영광 시인- 경북 의성 출생. 고려대 영문과·동대학원 졸업. 1998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시가 당선돼 등단. 노작문학상, 지훈상, 미당문학상 수상. 시집 '직선 위에서 떨다' '그늘과 사귀다' 등 펴냄.

여행노트

▲ 류윤모 시인
이 시를 읽으면 어딜가나 이 땅의 장삼이사들이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살아온 과거의,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고향이 떠오릅니다.
 부글거리는 부기를 술로 달래며 술주정으로 날밤 새우다 해질녘이면 마늘 냄새, 술냄새 풀풀 풍기며 갈지자 걸음으로 집구석이라고 찾아들던 이 땅의 아버지, 아버지들의 대책없었던 인생이 떠오르곤 합니다. 이성복 시인은 아버지 X새끼 넌 입이 열 개라도…. 원색적인 욕을 퍼부음으로써 아버지에 대한 반항을 표출한 '툭하면 아버지는 오밤중에/ 취해서 널부러진 색시를 업고 들어'선 첫 구절 이후 더 읽지 않아도 떠오르는 아버지의 폭력적인 행위는 반면교사가 됐고 더구나 그런 행동에 아프단 소리도 못하고 '입을 꾹 다문 채 술국을 끓이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성장해야만 했습니다. 그때의 증오와 노여움이 삭고 이제 이해될 나이쯤 되니 왜 그 인생들도 슬픈지 정녕 모를 일입니다.
 어느 날 문득 거울을 보면 제 얼굴이 죽기보다 닮기 싫었던 그 옛날 어른이 서 있기라도 한 거 같아서 섬찍하곤 합니다. 한 시대를 울분으로 살다간 아비의 족적을 따라 찾아갔을 시인의 발길이 닿은 곳은 혈육이 모이면 으레 혈압이 오르던 고향. 철지난 빛바랜 옷같이 시들시들해진 나이에 찾아든 꿈결같은 젓가락 장단의 버들집 니나노.
 낮술에 취해 어느 길고 주린 봄날의 아버지처럼 그 아버지의 아버지처럼 질기고 어리석은 고독으로 숨 막히도록 답답해서, '보행기를 밀고 가는 석양의 늙은 여자는 어머니, 어머니, 불러도, 귀먹어 돌아볼 줄 모른다' 부분에선 기어이 참았던 울음이 탁 터져 나옵니다. 누구나 기억 속 이런 정신적 폐허의 고향 하나쯤 없겠습니까 마는. 류윤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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