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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규시(子規詩)

                                                                   
한 마리 원통한 새가 되어 궁궐을 나와
짝 잃은 외로운 몸 푸른 산 중에 있네
밤마다 잠을 청하나 잠을 이룰 수 없고
수 없이 해가 지나도 한은 끝이 없어라
자규새 소리도 끊긴 뫼엔 달빛만 희고
피 뿌린 듯 봄 골짜기 낙화만 붉었네라
하늘은 귀가 멀어 슬픈 사연 듣지 못하니
어찌해서 수심 많은 내 귀만 홀로 듣는가

※단종은 관풍헌 동쪽에 있는 자규루(子規樓)에 올라 자규시를 읊으며 한을 달랜다.


찬란한 이 봄날, 남들은 꽃놀이다 뭐다 다들 유쾌하게 사는 것 같은데 나만…. 이라는 자괴감에 갈수록 내면으로 파고드는 골뱅이족이 있다면 남들의 시선은 거리낌없이 혼자서 가볼만한 곳을 소개합니다.
 어쩌면 보편적인 인간은 근원적으로 이기적인 존재,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나보다 팍팍하게 살아가는 이웃을 보며 힘을 낼 수 있다고 갈파했습니다.
 이이제이, 이독제독이라고 했던가요. 오랑캐는 오랑캐로, 독은 독으로 다스린다는 옛말도 있습니다. 심신을 삭이는 독 같은 고독의 감정은 나보다 더 비통했던 한 시대의 인물을 만남으로써,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여정으로 치유할 수 있다면 비약일까요.
 봄을 맞으러 남녘으로 내려가는 분답스런 인파를 등지고 강원도 영월에 있는 비운의 왕, 단종의 릉을 찾아나선 발걸음은 한갓질 터입니다
 무거운 배낭을 부려놓고 열차 뒷칸 맨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덜커덩 덜커덩 이어지는 인내의 시간을 달려 영월역에 내려 장릉행 버스 시간표를 올려다 봅니다. 낡은 버스 뒤꽁무니에 흙먼지를 일으키며 시골길을 달려 '장릉'이란 팻말을 확인하곤 벙거지 모자를 뒤집어 쓰고 내려 터벅터벅 걷습니다.
 버려지다시피했던 장릉도 이젠 어딜가나 사람 손길로 단장하고 가꾼 흔적이 역력할테고 역사적 슬픔까지도 관광객 유치를 위해 리모델링한 세상인심이 씁쓰름할 것입니다.
 익히 알려진 대로 12세에 보위에 오른 단종의 짧았던 제위는 물가에 아이 세워놓은 듯 위태로웠을 것이고 결국 야망의 포로였던 사나운 삼촌 수양대군에게 보위를 빼앗기고 이곳 청령포로 위리안치됩니다. 폐위된 소년왕 단종은 산첩첩, 물첩첩 가로막힌 청령포 노산대에 앉아 시름에 잠겨 서울 하늘에 두고온 정순왕후 그리워 눈물로 지새우다 비운의 생애을 마감합니다.
 유배지를 찾아 온 금부도사 왕방연의 '고운 님 여의옵고/ 물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라는 시가 먹먹하게 다가옵니다.
 단종의 통한이 얼마나 깊었을까. 밤마다 소쩍새 울음이 돼 이산 저산 떠돌고 등 굽은 소나무들이 어린 왕이 만조백관을 주재하는 어전의 모습을 빼닮아 나그네의 시름위에 시름을 더할 것입니다.
 '그대에게 가면/ 그대 아직도 날 알아볼까? /나 열다섯 꽃다운 /그때로 보여질까' 15살 단종의 왕비가 됐다가 18살에 노비가 돼 구걸과 염색으로 연명하다 82세로 한 많은 생을 마감한 정순왕후의 넋이 날아들어 골골이 뼈저리게 새겨져 있을 것입니다.
 울적한 심사를 안고 찾아든 길손에게도 500년전 비운의 주인공의 막막한 심사가 그대로 전이돼 슬픔은 더 큰 슬픔으로 덮고 천지를 뒤덮었을 고독으로 일신의 고독을 덮고, 바위같은 절망으로 절망을 덮어 쓰러진 자 다시 일어설 용기와 힘을 얻고 돌아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류윤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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