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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아니스트

아름다운 봄날의 연속이다. 잔인하게 아름다운 4월이라는 말이 나에게 꼭 들어맞는 오늘이다. 출산 후 조리 중인 나는 밖에 나가고 싶어도 나가지 못하고 창밖으로 따스한 햇볕과 바람을 상상하며 바라볼 뿐이다.

 가곡의 왕이라고 불리우는 '프란츠 슈베르트'의 곡 가운데 '그대는 나의 안식 Du bist die Ruh'이라는 곡이 있다. 그 곡이 내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맴돌고 있다. 눈을 감고 이 곡을 듣고 있자면 내 몸이 가벼워지면서 하늘로 붕붕 떠오르는 느낌이다. 평화로운 느낌이랄까. 많은 가수들 중 테너 '이안 보스트리지 Ian Bostridge'가 부른 이 곡이 나에게는 최고다.

 성악곡을 감상하는 묘미 중에 하나가 같은 곡을 여러 가지 다른 음색으로 들어 볼 수 있는 것 아닐까? 사람의 목소리는 다양하고 그만큼 아름답다. 여성가수와 남성가수의 목소리로 나뉘고 거기서 또 여성가수는 높은 음역의 소프라노와 낮은 음역의 메조 소프라노, 알토가 있고 남성가수는 높은 음역의 테너와 낮은 음역의 바리톤과 베이스 이런 식으로 나뉜다.

 입을 열면 소리가 쏟아져 나오는 것처럼 노래를 부르는 성악가들이 참 신기하고 부럽다. 자신의 목소리로 저렇게 아름다운 것들을 표현할 수 있으니 스스로 노래를 부르면서도 얼마나 감동스러울까? 물론 성악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들만의 고충이 얼마나 클까?

 슈베르트는 31세의 나이로 요절한, 평생 가난하고 힘들게 산 작곡가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죽을 때까지 그곳을 거의 떠나지 않았다. 그가 작곡한 많은 작품 중에 가장 사랑받으며 후세에도 업적을 인정받는 작품들이 바로 성악곡이다.

 이것을 '리트 Lied'라고 부른다. 가곡이란 뜻이다. 그의 리트는 이전 작곡가들의 리트와는 이념이나 전개방식부터 너무나 달랐다. 이전 작곡가들이 시나 가사가 잘 전달되도록 반주를 붙이는데 만족했다면 슈베르트는 피아노 파트가 성악파트와 동등한 자격을 갖고 독자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슈베르트가 죽은 후, 그의 리트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그의 작품들은 '예술가곡 Kunstlied'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내며 인정 받게 된다. 그는 생전에 인정받지 못하고 행운도 그를 피해가는 불운하며 비참한 생을 살았다고 알려져 있지만, 다르게 생각해 보면 짧은 생애 동안 600여 곡의 리트와 그외 수많은 작품을 작곡했던 뜨거운 열정이 있는 삶을 살았다. 그걸 불행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만약 운이 따라 경제적으로 여유 있고 좋은 직장에서 바쁘게 살았다면 어쩌면 그의 작품은 그리 많치 않았을 수도 있고, 결핍에서 나타날 수 있는 어떠한 애절함이 없어졌을 수도 있지 않을까? 비록 친구집에 얹혀 초라하게 살았지만 몇 안되는 진정한 음악애호가 친구들과 매주 모여 새로운 작품을 연주하고, 그들과 함께 있는 그림 속 슈베르트는 결코 초라하지도 슬퍼보이지도 않는다.

 2년 전 4월 이맘때쯤 세월호 사건으로 온나라가 슬픔에 잠겼을 때 첫 아이를 낳았다. 비슷한 시기에 둘째 아이를 낳다보니 그때 사건이 다시 떠오르면서 마음이 먹먹해 진다. 그때는 아이를 낳았을 뿐이었다면 지금은 아이를 키워본 부모로서 그들의 아픔을 감히 조금 더 헤아릴 수 있다고 해야할까.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4월 하얀 벚꽃의 흩날림이 아이를 잃은 부모들의 눈물처럼 내 가슴 속에 차갑게 박힌다. 아이를 얻은 내가 괜히 미안해지던 잔인했던 2년 전 4월이 다시금 떠오른다.

 '그대는 나의 안식 Du bist die Ruh' - 뤼케르트 Friedrich Rueckert
 그대는 나의 안식 그리움과 평화로다.
 그대는 나의 기쁨, 나의 고통 나 그대에게 축복하리.
 내게 와주오. 내 맘 깊이 저 문을 닫고 나에게 와주오.
 내 맘의 고통을 잊게 해주오. 기쁨만이 남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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