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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림사지
                                                       백무산

석탑 하나 마주하고서
저물도록 그 앞을 떠나지 못합니다

오늘에서야 처음 본 탑이지만
탑은 나를 천 년도 넘게 보아온 듯
탑 그림자가 내 등을 닮았습니다

수억 광년 먼 우주의 별들도 어쩌면
등 뒤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석탑 하나 마주하고 오래 서 있자니
나의 등이 수억 광년 달려와
나를 정렬하고 마음을 만납니다

옛사람들은 거울보다 먼저
마음을 비춰보는 돌을 발명하였습니다
-『初心』(실천문학사, 2003)


●백무산 시인- 1955년 경북 영천 출생. 1984년 시 '지옥선'으로 데뷔. 2012 제20회 대산문학상, 2009 제1회 임화문학상, 2009 제2회 오장환문학상, 2007 제6회 아름다운 작가상, 1997 제12회 만해문학상, 1989 제1회 이산문학상 수상.


경주 모처의 창림사지를 마주하며 시인은 깊은 내면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상징으로 내세운 석탑을 통해 힘겹게 구축하려한 유토피아적 세계관이 무너지고 폐허로 남은 쓸쓸한 빈터에서 시인은 등을 보이며 이상향은 별처럼 멀리 있구나 탄식했을지도 모를 일. 자신의 족적을 객관화해 보이며. 80년대 박노해와 함께 쌍벽을 이루던 시대정신, 무산계급의 사자후였다고 할까. 이제 뜨거운 가슴에서 강철 같은 차가운 이성으로 돌아와 스스로를 정렬하는 듯하다. 초지를 일관하며. 갈구했던 인간적 세계관의 허망한 폐허를 마음의 거울에 비춰 보인다.
 "나의 등이 수억 광년 달려와/ 나를 정렬하고 마음을 만나는" 것을 느끼고, "거울보다 먼저/ 마음을 비춰보는 돌을 발명"한 옛사람들을 만난다. 또 "탑 그림자가 내 등을 닮았"음을 깨닫는다. 이러한 농익은 발효는 90년대를 지나 2000년대에 이르는 긴 시간동안 시집 '인간의 시간'(창비 1996), '길은 광야의 것이다'(창비 1999), 다섯째 시집 '초심'을 펴내는 등 시적 연단(鍊鍛)의 결과물이다.
 무쇠를 벌겋게 달궈 망치로 내려치고 찬물에 식히길 거듭하는 담금질 끝에 강철이 되고 강철을 벼려 더운 피가 끓는 가슴을 베고 지나가는 서늘한 검이 된다.
 백무산이란 이름은 80년대의 시대정신이다. 세월의 급류에 많이 낡아있음에도 30여년 전 일별한 기억의 편린만으로도 남울산우체국에서 서로를 알아보았었다. 가파름을 향해 순정하던 시인의 시선이 한층 넓어지고 맑아져 있음에 시편들이 독자 마음에 편안하게 자리매김한다. 방법론에 있어서의 반성이었달까. 시대는 옳다 그르다에서 좋다 싫다로, 화면이 급박히 바뀌어 버렸으므로. 동시대를 고민했던 이라면 시인의 발자취를 따라 인적 없는 쓸쓸한 청림사지를 찾아볼 일이다.  류윤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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