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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통에 뭔가를 넣고 칙칙 뿌리기만 하면 되는 스프레이는 빠르고 편리해 여러모로 이용되는 도구다. 벌레를 잡기 위해 약을 뿌리거나, 표면에 마감재를 고르게 칠하거나, 심지어 얼굴에 화장을 할 때도 사용한다. 특히 뭔가를 구분하기 위한 표시를 할 때 더없이 편리하다.

 스프레이 사용의 인상적인 예로 사고가 났을 때 흔적을 남기기 위해 뿌리는 경우가 있다. 교통사고 때 차량 위치를 표시하거나, 사망사고의 경우 사고 당사자 모습을 스프레이로 본 떠 놓는다. 아스팔트 위에 그려진 다양한 모습의 등신대는 우리를 복잡한 심정에 빠지게 한다. 누군지 모르지만 안타까움에 짧은 기도를 올리게 되고, 저와 달리 나는 아직 살아있다는 안도감이나, 더 주의해야겠다는 다짐. 혹은 영혼이 빠져나간 뒤의 텅 빈 실체를 들여다보는 기분 등.

 몇 해 전 로터리에서 스프레이로 본을 뜬 사람 모양 위에 차가 멈추게 된 적이 있었는데, 기분이 정말 묘했다. 뭐랄까, 내가 일으킨 것은 아니지만 사고가 다시 반복되는 느낌. 타임 슬립이 일어나 같은 장소에서 같은 사건을 되풀이해 겪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낡은 건물 위에 칠해진 철거반대, 혹은 철거예정이란 스프레이 글씨는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사람들이 서둘러 떠난 뒤 남아있는 부서진 가재도구나 삐걱거리는 대문, 이미 잡풀이 고개를 들고 있는 모퉁이. 시멘트벽에 검게, 혹은 붉게 쓴 글씨는 왜 그리 위압적인지. 함부로 흘리고 휘갈겨 써서 집에 대한 마지막 예의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스프레이 글씨가 써진 시멘트벽은 삽시간에 낡아 보이고, 붉은 글씨는 흉터에 앉은 굳은 딱지처럼 보인다. 시댁의 시골 마을에 골프장이 들어선다고 시끄러웠을 때, 마을 벽들도 골프장 반대라는 스프레이 칠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골프장은 들어섰고, 스프레이 자국은 다른 페인트로 덧칠해졌다. 얼룩 같은 앙금이 남은 셈이다.

 표시를 하기 위해 뿌려진 스프레이는 그로 인해 무리에서 벗어나 다른 것과 구별 짓고, 차별화 한다. 그것은 당사자를 더없이 위축시키고 주눅 들게 만드는 것이다. 가령 개를 상업적으로 기르는 데서는 팔거나 보신탕감으로 점 찍어둔 개에겐 이마에 스프레이를 뿌려 표시를 해둔다고 한다. 그러면 아무리 흉폭했던 개라도 더할 수 없이 얌전하게 구석에 박혀 주인의 눈치를 보며 처량하게 낑낑거린다고 한다. 개들도 스프레이가 자신을 다른 개와 구별해주는 무언가란 것을, 그것이 목숨 줄을 쥐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아는 모양이다.

 겨울 숲을 지날 때, 줄기에 스프레이 칠을 한 나무를 만난다. 아마 병충해 때문에 베어 낼 나무들에게 스프레이로 표시를 하는 모양이다. 재선충이 기승을 부리던 해에는 뒷산 소나무에 거지반 스프레이가 칠해졌다. 꼬챙이처럼 마른 소나무가 스프레이 칠을 하고 있는 모습은 안쓰럽다. 단정하고 하얗게 칠해진 스프레이 자국은 소매에 두른 상장(喪章)과도 같다. 영화에서 본 헐렁한 제복에 완장을 찬 어린 홍위병이 떠오른다. 완장은 상장이 돼, 문화대혁명기에 광적인 추진세력이었던 홍위병들은 그 광풍이 지나간 후엔 썰물 뒤 남겨진 조개껍데기처럼 철저히 버려졌다. 어린 나무는 숲의 일원임을 채 느끼기도 전에 톱날에 스러질 것이다.

 이처럼 스프레이는 이것 저것을 구별하고 차별 짓는 낙인효과를 가져 온다. 하지만 그것의 신속성과 가변성 때문에 때론 놀라운 효과를 낳는다. 1960년대 미국 흑인들은 억압에 대한 저항의 표시로 지하철역이나 공공장소 벽에 스프레이로 낙서를 시작했다. 자유와 평화, 안전에 대한 갈망을 즉흥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도시의 골칫거리로 여겨졌던 그라피티가 대중예술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것은 장 미셀 바스키아라는 흑인 예술가 덕분이다. 검은 피카소라 불릴 정도로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바스키아는 스물여덟 짧은 생처럼 강렬한 그라피티를 남겨, 빨리 지우고 없애야하는 낙서로 여겨졌던 스프레이 그림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 올렸다. 이후 그라피티는 20세기 초 디에고 리베라 등이 참여해 멕시코 예술의 대중화를 이끌었던 벽화운동과도 궤를 같이 하는 길거리 예술, 참여 예술로 발전했다. 지배층의 억압과 권위에 저항하는 역동적인 퍼포먼스로.

 그렇다면 스프레이는 누가 그것을 쥐고 뿌리는가 하는 방향에 따라 모습을 달리하는 도구인 셈이다. 즉, 스프레이를 맞는가 뿌리는가 하는 입장 차이에 따라 낙인 효과로 차별 되는가 억압에 맞서 싸우는가로 나뉘게 되는 것이다. 스프레이. 이 단순하고 편리한 도구도 이처럼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이미 너무 많은 생각을 했으니 이제 그것을 뿌릴 차례다. 경우 없이 일찍 나와 깐죽거리는 초파리들을 향해 에프킬라를 사정없이 뿌린다. 칙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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