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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골(甲骨)길
                                                            도광의

경남 함안여고(咸安女高)
백양(白楊)나무 교정에는
뼈모양의
하얀 갑골(甲骨)길이 보인다.
함안 조(趙)씨, 순흥 안(安)씨, 재령 이(李)씨
다투어 살고 있는
갑골리(甲骨里)에는
바람 많은 백양(白楊)나무 생애로
노총각 한선생(韓先生)이 살아 왔다.
산까마귀 울음 골짝에 잦아
외길진
뙈기밭 능선을 이웃하면
함안 조(趙)씨, 순흥 안(安)씨 사당(祠堂)들이
기왓골에 창연(蒼然)하다.
명절날 둑길 위로
분홍 치맛자락이
소수레 바퀴의
햇살에 실려가면
(하략)

●도광의 - 1941년 경북 경산 출생. 1966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시 '비 젖은 홀스타인' '해변에의 향수' 당선. 1978년 현대문학에 '甲骨길' 등 6편 추천. 
 



▲ 류윤모 시인
하얀 뼈 모양으로 구부러지고 휜 갑골길을 보고 있다. 어느 시골이든 뼈대를 중시하는 집성촌이 있었다. 뼈대란 것의 정체성은 뭔가. 돈만 많으면 남을 부리고 거느릴 수 있는 질서가 판치는 배금주의 풍토 속에. 궁극적으로 주체로서의 자신을 망각하지 않고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결곡한 길 아니겠는가. 갑골길은 오가는 발자국들이 쌓여 이룬 지층 같은 길이다. 발자국을 뜯어먹으며 길은 명맥을 유지한다. 길에서 우리는 들꽃도 들풀도 봇도랑도 보고 앞을 보고 걷다가도 하늘 한번 쳐다보고 제대로 오고 있나 뒤를 돌아볼 여유란 게 있었다.
 먹 도둑놈의 시커먼 속 같은 아스팔트를 쳐 발라 일사천리, 직선으로 내버린 도로는 생각이란 게 숙변처럼 머물 틈도 없이 휙휙 빠져나가버리는 속도일 뿐. 이 시에서 기울고 낡아가는 모습이지만 사당과 향교, 정자들이 뼈대의 존재를 안간힘으로 떠 받치고 있다. 함안 조씨, 순흥 안씨 사당들이 기왓골 골골이 영고성쇠의 전설을 간직한 갑골길. 마치 마음의 고향을 돌아보듯  편안하고 친근하다. 시가 너무 길어 불가피 하략처리 했지만 마지막 행의 '편(片)구름'은 독자가 고향 하늘을 연상케 하는 매개다. 이 시의 미덕은 매우 쉽게 썼다는 점이다. 독자에게 친숙하게 접근해 현대인들이 잃어버린 추억을 되새기는 공간을 열어 준다는 점. 사통팔달 도로가 뚫리면서 갑골길들이 사라져가고 있다. 다 사라지고 나면 언젠간 이 또한 그립지 않을 것인가.  류윤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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