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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진료를 하다보면 생각보다는 애정과 관련해 많은 환자를 보게 된다. 그중에서 특히 필자가 안타깝게 생각되는 커플은 분명 사랑은 있는 것인데 사랑의 감정에서 대상이 자신을 배반했다고 느끼는 경우이다.

 평생을 같이 하자고 결혼을 결정했는데, 서로를 어떻게 만났고 또한 서로에게 어떤 것을 기대하는가. 예전에는 집안 어른들이 짝을 정해주는 경우 본인들이 결정하는 부분이 적어서 사실은 오히려 더 '지혜'롭게 만남이 이루어졌다는 생각을 하게도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녀의 사랑이라는 것은 '로맨스'라서 그렇게 집안 간의 또는 사회적 관습이나 기능에 맞춘 것만이 아닌 두 사람간 사랑이란 감정의 결합이므로 감정의 부침은 어쩔 수 없이 생겨나는 것 같다.

 아마도 법상 스님이 어느 법문에서 한 이야기 중에 "내게 사랑과 기쁨을 주었던 대상이 시간이 지나면 괴로움과 미움을 일으키는 대상으로 변해 있다"고 한 말이 생각난다. 스님이라서 오히려 더 그런 사랑 현상을 잘 지켜봤던 것인가. 공감이 가는 말이었는데, 왜 사랑은 시간이 지나가면 미움이 되고 마는 것인가.

 우리가 배우자를 선택하는 데는 여러 가지 요소가 영향을 미친다. 집안·학벌, 그리고 경제적 상태도 상대를 선택하는데 주저하게 만드는 요소일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그를 선택하게 만드는 것에서 심리적 요인은 중요할 것이다. 그들 중 우선은 자신의 '내적 인격'이라고 하는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영향을 말할 수 있는데, 남자의 경우 자신의 속마음인 아니마가 상대 여성에게 투영돼 그녀에게 끌린 것일 수 있고, 여성의 경우는 내적 인격인 아니무스가 상대 남성에게 투영돼 그를 선택하는 계기가 됐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상대에게 내 부분인 마음이 '투사'됐을 때는 사실 그 기분이나 생각을 잘 살펴봐야 한다. '투사'란 결코 '의식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무의식적'으로 어둠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어서, 자신이 관여됐음에도 나는 그냥 그녀가 매력이 있어서 좋아하는 것일 뿐이라고 느끼게 된다.

 또한 내적 인격인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보통 '자아'의 어두운 부분인 자신의 '그림자'보다 더 '멀리'있는 것이고, 마치 자신 속의 '타자'인 것이어서, 그 투사를 알아차리는 것은 그림자보다 더 어렵고 사실은 그림자 의식화가 어느 정도 되고 난 다음에야 남자의 경우라면 자신의 아니마를 인식하는 것이 가능해진다고 말한다.

 그 아니마는 또한 한 가지 모습도 아니다. 오히려 그 아니마의 '발달단계'를 말하기도 한다. 처음에는 이브였다가, 그 다음 헬렌, 그리고 마리아에서 소피아까지. 우리가 자신의 아니마 감정을 발전시키는 감정작업을 했을 때, 우리는 상대에게서 더 여성으로서의 원숙한 모습을 거꾸로 찾아낼 수 있다.

 이러니 사랑을 찾아가는 것은 어렵기도 하고 또한 혼란스러운 것이다. 자신의 자아의 그림자가 해결 안 되어 자신의 아니마와 현실에서의 상대 여성을 보지 못할 수 있고, 거기다가 상대방 이성을 대하는 그 '사랑'이라는 게 자신의 '내적 인격'이 '분화' 된 정도에 따라 영향을 받을 것이기에, 만약 이런 과정으로서의 사랑이 다시 새롭게 '태어나지 않는다면' 사랑은 그 구조상 사실 '배반'하게 되어있는 구조인 것이 아닌가.

 황동규 시인은 18세 때 연상의 여인을 사모하는 마음을 '즐거운 편지'라는 시를 통하여 나타냈는데, 이렇게 시작한다.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 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이미 18세 때 시인은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나의 사랑을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고 말한다. 이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라고 한다.

 18세 그 나이에 그가 기다리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사소함이지만 결코 사소함이 아닌 '반어법'적인 사랑으로 기다린다는 것인가. 우리가 사랑한 것도 그렇고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사랑도 언젠가 그칠 것이며, 그런 때에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한다"는 것은 "그동안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 것이며, 새로워지는 그대와 나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새로워진 대상은 머물려는 사람에겐 배반인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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