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중섭 作 '흰소', 합판에 유채, 30×41.7㎝, 1953년, 홍익대학교박물관 소장.

1953년 휴전협정으로 인간의 생존본능만 남긴 전쟁이 멈추고 1년 반도 되지 않아, 서울 미도파화랑에서 이중섭 개인전이 열렸다.

    유화 41점, 연필화 1점, 은지화 등 소품 10점이 전시됐는데 판매 예약을 알리는 붉은 딱지가 26개나 붙었다. 전시가 끝나면 값을 치루고 갖겠다는 표시의 위세가 이 정도였으니, 여리디 여린 가슴을 가진 이중섭도 당연히 기쁨으로 술판을 벌였다.

 하지만 요즘 말로 '노쇼(no-show)'라고 하던가. '저 사람 사는데 나도 사야지'라고 욕심을 냈다가 정작 값을 치룰 때가 되자 꼬리를 내리고 얼굴을 싹 바꾸고 말았다. 지금도 여전하지만, 예술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체면과 허세를 추구했던 것이다. 비참한 전쟁의 상흔이  널려있는데도 말이다. 결국 이중섭은 좌절로 가득 찬 가슴을 안고 대구로 내려가고 말았다.

 하지만 이듬해인 1956년 정신이상 증세와 간염이 심해져 여러 병원을 전전하다가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병원에서 행려자로 처리되고 3일이 지난 뒤 병원을 찾았던 김이석에 의해 그의 죽음이 알려지고, 밀린 병원비 절반을 깎아 장례식장에서 모금한 돈 9만 원을 치루고 이 세상과 영원히 작별했다.

 평안도 평원의 부잣집 유복자로 태어난 그가 남북으로 나뉜 조국의 현실 때문에 형의 재산을 몰수당하고 남으로 내려왔지만 친구와 이웃과 세상에 속고, 자기의 마음에도 속아 마지막 십년은 누구보다 물질적으로 궁핍하고 불행하게 보냈다. 일본 유학 때부터 그의 예술성을 기대하는 이들이 많았기에 전쟁와중에도 붓을 놓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친구들과 후원자들 때문이었다.

 또 그만큼 순진한 그를 속여먹는 이들도 그의 주변에 들끓었다. 그의 작품은 격차가 있기는 하지만, 유려하고 군더더기 없이 대상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능력은 누구도

학예연구관
따라올 수 없었다. 그림에 담긴 마음을 구구절절이 읽게 할 수 있는 능력도 따라올 작가도 몇 안 된다.     

 껍데기가 판치고 어리석게도 그 허세를 믿어버리고 마는 요즘 미술계에서 이중섭은 신화일 수밖에 없다. 밥벌이로 그림을 그리고, 예술한다고 허풍을 친 이 세상에서 자신은 가짜라고 했다는 증언을 믿는다면 말이다. 너무 부끄러워 아무도 찾을 수 없는 차가운 병실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도 누구에게도 알리기 싫었을 것이다. 그의 여린 성격으로는 분명하다.

 사족,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미술관에서 '이중섭 탄생 100주년 기념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신화를 볼 수 있는 다시없는 기회라, 얼른 기차를 타야하는데….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