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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다녀간 다음날의 날씨는 언제나 상큼하다. 강신재의 단편 '젊은 느티나무' 첫머리 생각이 난다. 비누냄새를 풍기며 다가오는 그를 보지 않고도 아는 그녀처럼, 나의 감각은 풋풋한 오월 아침이 한 발자국씩 걸어오는 쪽으로 열린다. 햇볕과 바람이 미처 다 가져가지 못한 비 냄새며 신록의 풋 비린내며 꽃들이 뿜어내는 향기며 그 모두가 한데 섞인 싱그러움을 한껏 들이마신다.

 운동하러 다니는 센터를 가려면 작은 공원 하나를 지나게 된다. 그곳에는 오월의 찔레장미가 초등학교 담 벽을 온통 희고 붉게 수놓고 있는 소로가 있다. 막 햇살 받은 싱싱한 클로버 잎과 꽃이 그렇게 고울 수 없다. 넉넉히 뽑아도 다시 피워 올릴 클로버 꽃을 생각하고 한 움큼 가져다 종이컵에 꽂았다. 소박하고 정갈한 클로버 꽃에서 아카시아 향기가 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다시 클로버 밭에 엎드렸다. 어떤 시인은 둥근 것만 보면 쪼개고 싶다는데, 나는 클로버만 보면 네 잎 클로버를 찾고 싶어진다. 길 가다가도 클로버가 보이면 그곳이 어디든 쪼그려 앉는다. 습관이 돼버린 이 행동은 그간 어떤 행운을 불러왔는지 기억에도 없지만, 찾는 순간 낮은 탄성을 지르니 그 순간이 바로 행운이 아닌가 생각한다.

 네 잎 클로버는 척박한 곳에서 더 잘 발견된다. 하나를 찾으면 연이어 곁에서 나타나는 네 잎 클로버. 그러나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그날도 겨우 벌레 먹어 구멍 난 네 잎 클로버 한 잎을 보물처럼 찾아 쥐고 다음 행운을 향해 엎드려 있을 때 인기척을 느꼈다. 흘낏 보니 꼬마 친구다. "뭐해요? 뭐가 있어요?" 말을 걸어오는 녀석.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응. 네 잎 클로버 찾아" "클로버는 세 잎인데" 뭐하러 굳이 네 잎을 찾느냐는 뜻으로 녀석이 알은 체를 해왔다. 내 손에는 찾은 지 한참 된 네 잎 클로버 한 잎이 시들어가고 있었다. 시선이 느껴져 어린 친구를 얼핏 바라보았다. 눈이 맑고 똘똘하게 생긴 사내아이였다. 왜 여기 있어? 물었더니, 친구가 없어서 라고 대답한다. 그때 녀석의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어떤 쓸쓸함이 건너오는 것을 느꼈다. 잠시 고개를 드니 저쪽 길가에 노란 학원버스 대여섯 대가 학생들을 싣고 있었다. 나는 얼른 "이거 줄까?" 시든 클로버를 내밀었다. 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벌레 먹은 네 잎 클로버는 녀석 손에 건네고, 나는 네 잎을 포기하고 클로버 꽃을 따기 시작했다.

 아래쪽이 마른 꽃을 피해 싱싱한 꽃을 골라 따는데, 녀석은 도와준답시고 말라가는 꽃까지 뜯어서 내 손에 쥐어준다. 일학년이야? 자그만 체구가 영락없이 초등학교 일 학년 같아 보여서 말했더니, 녀석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아니요, 2학년이요.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진다. 나는 일 년 차이가 그리 펄쩍 뛸 건가 머쓱해서 너 혹시 시 알아? 하고 말을 이었다. "알아요, 동시. 나 그거 잘 해요. 나는 책도 좋아하는데. 저녁마다 아빠가 읽어주는데" 녀석의 말을 이해하는 속도는 또래들보다 빨라 보였다.

    "그럼, 상도 탔겠네"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아차, 싶었다. 그새 또 속물근성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런데 녀석이 멋있게 수습했다. "탈 뻔 했지요" 그 틈을 타고 나는 상, 그것 중요한 것 아냐하며 실수를 무마하고자 나를 소개했다. 대단한 연관성이라도 있는 듯 시를 쓰는 사람이라고. 상에 대해 조금 안다는 뜻으로. 그러나 차마 무명이란 말은 하지 못했다. 녀석은 나를 힐끗 보더니 말이 없다. 침묵이 어색해서 넌 꿈이 뭐냐? 물었더니 단 1초 망설임도 없이 의사요 한다. 왜 의사가 되고 싶은 거야? 물었더니, 엄마가 아파요 한다. 고개 숙인 녀석의 몸에서 맥놀이처럼 퍼져 나오는 둔통이 느껴졌다. 가슴이 싸 해온다.

    녀석의 상처를 건드린 것은 아닌지 걱정됐다. 그래서 넌 글 쓰는 아주 멋진 의사가 될 거야 해도 녀석은 응답이 없다. 아주 짧게 녀석의 옆 얼굴을 훔쳐보았다. 그걸 느꼈는지 녀석은 자리를 박차고 저 만치 걸어가더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꼭 다 큰 어른의 행동을 보는 것 같았다. 묻지 말아야 할 것을 물어 녀석을 흔들어 놓은 것은 아닌가 싶어 얼른 "너 더 있을 거야? 할머니는 갈게"했더니 섭섭해 하는 눈치다. 벌써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다. 나 지금 잘하는 건가? 갈등하며 일어서 오는데 녀석이 벌인지 나비인지 좇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으나 돌아보지 못했다. 나도 모르게 고인 눈물을 행여 들킬까 염려스러워서였다.

 어쩌면 녀석의 엄마는 단순 감기쯤일지도 모르고, 잠시 학원 차를 놓쳐서 나랑 시간을 보낸 것일 수도 있는데, 나 혼자만의 감상이었지 모른다. 또 어쩌면 녀석은 낮에 만난 자신보다 더 철없어 보이는 할머니 얘기로 저녁 밥상에서 이야기꽃을 피울 수도 있겠고.

 그 후 운동 끝나고 돌아갈 때 녀석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일이 한동안 지속됐다. 아쉽게도 이후 녀석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점점 지워져가는 꼬마 친구, 모쪼록 꿈을 향해 나아가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길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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