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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문학가

25년을 살았던 집인데도 친정에 가서 자고 오는 일이 잘 없다. 아파트 생활이 편한 데다, 오래된 시골집이 지저분하고 불편하다. 우리 집에서 안 자는 것은 엄마도 마찬가지다. 어쩌다 딸네집에 걸음해도 주무시고 가는 법이 없다. 갑갑한 아파트에서는 천금을 줘도 단 하룻밤을 못 주무시겠단다.

    엄마와 딸. 세상에 이보다 더 말랑말랑한 관계가 어디 있겠냐마는 살을 비비고 같이 눕는 일이 거의 없다. 그뿐인가. 엄마는 우리 집에 아예 오시지도 않으려 한다. 피치 못할 경우가 아니면 좀처럼 시골집을 떠나지 않으신다.

 그런데 지난달 나는 엄마와 장장 열이레 밤을 같이 잤다. 밭일을 마치고 돌아오시던 엄마가 전동차에서 뒹구는 사고가 있었고, 그 결과 세 달을 꼬박 깁스를 하고 계셔야 했다. 병원에 입원하신 엄마는 삼 주일을 지내더니 제발 퇴원시켜 달라고 통 사정을 했다. 하지만 시골에서 혼자 사는 엄마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 대소변도 받아내는 통에 퇴원이라니. 이런저런 사정으로 당분간 엄마를 모시는 건 내 차지가 되었다. 엄마는 그렇잖아도 특히 더 아픈 손가락인 다섯째 딸집에 기거하게 된 것을 못내 미안해하면서도 따라 나섰다. 이참에 효도 한번 해야지. 나는 야무진 꿈을 안고 엄마한테 잘 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런데 이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엄마는 며칠 잠잠하더니 변하기 시작했다. 애들 학교 갈 시간이 다 됐는데 왜 일어나지 않느냐, 왜 밥을 그것밖에 안 먹느냐, 옷 입은 꼴이 왜 그러느냐, 왜 퇴근하자 마자 눕느냐…. 엄마는 사사건건 나를 따라 기어다니며 잔소리를 퍼부었다. 나이 드신 친정 엄마 한 분이 집에 오셨을 뿐인데 내 생활을 왕창 다 바꾸어야 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지나치게 나를 의식한 엄마의 행동이 또 불편하게 했다. 걸음은 고사하고 아예 일어서지도 못하면서 엄마는 누가 부축해 주는 것을 마다했다. 자존심이 강하고 신세지는 것을 싫어하는 엄마는 하도 기어 다녀서 무릎에 퍼런 멍이 들 때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다. 무엇보다 버젓이 아들 며느리 두고 딸집에 와 있는 것을 주변 사람들에게 내심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엄마의 잔소리는 일종의 우울증 같은 것이었다.

 엄마가 집에 오시면 목욕도 시켜 드리고, 매 끼니 때마다 맛있는 음식을 요리하고, 가요무대 같은 음악프로를 같이 보고, 마주 앉아 옛이야기를 함께 하면서 딸 노릇 제대로 해보자던 내 다짐은 무색해졌다. 내가 아무리 잘 해드려도 엄마가 바라는 것은 딴 데 있었다. 엄마는 아들만 오기를 기다렸고, 아들이 오면 억울한 일을 고해바치는 아이처럼 아들에게 그 동안 감춰놓았던 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집에 가고 싶다 노래를 불렀다. 그 순간, 내 눈에 엄마는 감옥에 갇힌 사람 같았다. 설거지 하다 고개를 돌려 보면 말없이 앉아 있는 엄마가 우리에 갇힌, 늙고 병든 사자 같을 때도 있었다. 

 남동생은 우리 집에 올 때마다 시골로 가고 싶다는 엄마를 다독이고 어르고 설득시켰다. 엄마, 한 달만, 몇 주만 더…. 그러면 엄마는 또 아들에게 설득당해 우리 집에 더 머무르기로 했다. 의사는 석달을 꼼짝 말라했지만 근 한 달이 지나자 엄마는 생 몸살을 앓았다. 걷고 싶어서. 집으로 가고 싶어서.

    그러더니 하루는 큰 소리로 나를 부르더니 눈물이 그렁한 얼굴로 시골집이 어디 붙었는지, 언양에서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불안해했다. 어릴 적 뛰놀던 동네는 생각이 나는데 60년을 넘게 살았던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가슴을 쳤다. 그럴 때마다 시골에 가면 다 기억이 날 거라고. 밥 잘 드시고 발 다 나으면 갈 수 있을 거라고 엄마를 진정시켰다.

 그 날은 문학회에서 단체 견학이 있는 날이었다. 엄마를 혼자 두고 나서는 발걸음이 무거웠지만 모처럼의 나들이가 즐거운 나는 홀가분하게 집을 나섰다. 그런데 그 날 진료를 받기 위해서 동생을 따라 나선 엄마는 그 길로 시골집으로 도망치듯 가버리고 말았다. 황당했다. 찔찔 눈물을 짜면서 전화를 걸었더니 우리 집에서는 한 번도 듣지 못한 엄마의 생기 가득한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 나왔다.

 그 동안 내가 품었던 마음들. 효도를 한다고 스스로를 추켜세우면서 엄마의 말을 잔소리라 여기고, 겉으로 웃으면서 속으로 찡그렸던 생각과 불만들이 죄스러워 눈물이 쏟아졌다. 빈 집에서 혼자 짐을 꾸렸을 엄마를 생각하자 야속하기도 하고 미안해서 목에 메였다. '울지 마라. 의사가 깁스를 풀어도 된다더라. 그래서 오늘 풀었고, 지금 니 동생이 발 씻겨 주고 있다' '그래 엄마 좋아?' '그럼 좋지, 집에 오니 살 것 같구나'

 그 순간 나는 알았다. 효도란 무조건 함께 사는 것이 아니라는 걸. 산해진미로 끼니를 채워 드리고, 비단 이불로 누울 자리를 봐 주는 것이 효도가 아니라는 것을. 효도는 보모가 가장 마음 편한 자리에 계시게 하는 것임을 뒤늦게 알았다. 엄마와 열이레 밤을 보낸 뒤에 비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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