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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처음에 네 발로 긴다.
 그 다음에는 두 발로 걷다가 나이가 들면 지팡이를 포함한 세 발로 걷다 생을 마감한다.
 하지만 내 어머니에게는 걸음을 위한 발로 엉덩이 하나가 더 있다.
 다른 모든 것이 쓸모 없어져 엉덩이만 있다 해야 옳은 듯 하다.
 이 엉덩이를 통한 이동이 힘겹지만 그나마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이러한 광경을 대하는 철없는 아들은 처음엔 고함으로 또 짜증 섞인 화난 목소리로 안타까움과 죄스러운 마음을 표하다가 어느덧 엄마의 발이 되어버린 엉덩이에 묻어나오는 흙과 먼지를 털어내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아흔을 훌쩍 넘기셨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도 유모차와 함께 여섯 개의 발로 걷던 어머니가 엉덩이를 발로 사용하게 된 이유가 있다.
 18세의 꽃다운 나이에 시조모와 시부모, 그리고 5남매의 장남인 아버지께 시집 온 어머니는 한 평생동안 위로는 부모형제 봉양에, 아래로는 5남매의 양육에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셨다.
 소작농 일과 손바닥보다 조금 큰 텃밭에서 재배한 채소를 키워 노점을 하는 고된 생활로 멀어져버린 눈과 귀, 굽어지고 뒤틀린 등으로 인해 다리에까지 신경이 올곧게 전달되지 못한 탓에 무릎으로 기다보니 자연스레 발등이 까이고 발가락에 상처가 나고 곪았다.

 더 이상은 통증 때문에 네 발로 걸을 수 없어 차선으로 엉덩이를 발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이른 새벽, 집 앞 텃밭에서 서성이는 나의 모습을 언제나 물끄러미 바라보며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가 어쩌다 내 눈과 마주하면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사람을 만난 듯 해맑게 웃으신다.
 하루 중 어머니가 두발로 서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짧은 시간이다. 당연히 두 팔이 함께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어머니는 또 다른 거울이다.
 마주하는 얼굴에 내가 웃으면 똑같이 웃고, 내가 지치고 힘들어하면 금세 얼굴이 굳어진다.
 손을 들어 '하이!'라고 외치면 똑같은 손짓을 한다.
 내가 눈웃음을 하면 두 눈을 감았다 뜬다.
 젊은이들의 윙크인 셈이다.

 마음을 표현할 줄 아는 살아있는 나의 거울인 것이다.
 다소 늦게 수확해 늙어버린 오이와 설익은 토마토를 소쿠리에 담고 안아오면 세상에 부러울 게 없다는 표정으로 "벌써 이렇게 익었나!"고 하신다.
 옛날이면 게으르고 어설픈 농부를 질책해야 함에도 말이다.
 방울토마토와 블루베리 몇 알을 깨끗이 씻어 어머니의 주름진 손바닥에 쥐어드린다.
 조식 전 어머니의 건강식인 셈이다. 이것은 오로지 나만의 생각이다.
 어머니의 방문은 사계절의 하루도 빠짐없이 반 쯤 열려있다.
 가족 모두가 돌아온 것을 확인하려는 본인 방식의 일석점호인 것이다.
 일찍 귀가해 눈을 마주하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이런저런 핑계로 늦게 돌아오는 날이면 안방문은 여전히 열려있고 코고는 소리가 방안에 메아리친다.

 하지만 어머니의 마음은 한 없는 기다림뿐이다.
 야윈 목은 기린목이 되고 몸은 맹수의 작은 소리에 벌떡 일어나 내달릴 수 있도록 준비된 겁 많은 얼룩말의 모습이다.
 눈으로 확인 못한 인원파악은 한밤중에도 이뤄진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함부로 흩어진 가족들의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하며 땀내 밴 냄새로 가족들의 귀가여부를 확인하는 것이다.
 어머니의 자식 사랑을 뜻하는 말에 '의문지망(倚門之望)'이 있다.
 문에 기대서서 바라본다는 의미다.

 자식이 성장해 먼 길을 떠나게 되면 어머니는 자식이 걱정돼 그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문 밖에서 기다린다는 말이다.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서 긴 목으로 기다릴 것 같은 어머니.
 장마철 잃어버린 금덩이 깨꿈 같이 내게서 언젠가 사라져버릴 것이지만 깨어져 헤어짐이 아닌 닳아서 사라지는 거울이 되어주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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