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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오랫동안 요양병원에 계셨다. 시간이 지날수록 잠이 길어져서, 돌아가실 무렵에는 거의 종일 주무시는 경우가 많았다. 어머니는 몸을 웅크리고 주무셨는데, 그게 꼭 뱃속의 태아나 갓난아기의 모습이다. 웅크린 자세로 보건데 삶의 시작과 끝은 같다. 자세 뿐 아니라 행동이나 사용하게 되는 물건도 비슷하다. 요양병원의 노인들은 턱받이를 하고 간병인이 떠먹여주는 음식을 몇 개 안 남은 이로 우물우물 씹었다. 기저귀를 차고 보호자의 손에 온전히 자신을 맡겼다. 걷지를 못하니 마른 덤불처럼 가벼워진 몸이 휠체어에 실려 끄덕끄덕 졸며 햇살을 쬐었다. 태평하고 천진한 표정이 정말 갓난아기와 같았다.
 물론 이것은 혼자 움직이기 힘든 아주 나이든 노인의 경우이고 그 전, 좀 더 젊어서 아직 다리를 써서 움직여야 하는 노인들은 지팡이 대신 굽은 몸을 유모차에 의지해서 다닌다. 유모차를 사용하는 노인들, 특히 할머니들은(유모차를 밀고 가는 할아버지는 아직 보질 못했다. 유모차가 모성이나 여성성을 상징하기 때문일까. 할아버지들은 지팡이를 더 선호하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사실 출산과 수유 등으로 할머니들의 허리가 좀 더 많이 굽었고, 그래서 지팡이보다 좀 더 편안한 유모차에 의지하는 게 아닌가 싶다. 할아버지들의 허리는 할머니들 보다 상대적으로 꼿꼿한 셈이다.) 거기에 몇 가지 물건을 담아 쉬엄쉬엄 밀고 간다.
 시골에선 호미나 씨앗봉지, 생수 통이 담긴 유모차를 밀고 가는 할머니를 볼 수 있다. 가까운 밭에 씨앗을 뿌리거나, 모종을 심거나, 풀을 뽑기 위해 유모차를 밀고 가서 상추나 열무 같은 푸성귀 몇 가지를 싣고 돌아오는 것이다. 한가할 때는 유모차를 밀고 경로당에 간다. 그래서 시골 경로당 마당엔 다양한 무늬의 유모차가 세워져 있다. 아침이면 유모차를 밀고 와서 저녁때면 굽은 몸을 의탁해 밀고 간다. 할머니 여러 분이 석양에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며 느릿느릿 유모차를 밀고 가는 모습은 목울대를 뜨겁게 울리는 뭉클함을 준다. 들판 너머로 지는 해는 유난히 크고 그때의 그림자는 유난히 길다. 소멸할 것에 드리우는 적막감과 경건함이 거기에 깃들여 있다.
 유모차는 아이가 걸을 때까지, 혹은 걸을 수 있게 되어도 얼마간 아기를 태우고 다니는 물건이고, 그 물건을 이제는 너무 오래 걸어서 다리가 뻣뻣하고 불편해진 노인들이 물려받아(?) 쓰는 것이다. 이렇게 손자에서 할머니로 전해지는 세대를 거스르는 전달. 그래서 대개의 유모차는 낡고 삐걱거리며 때가 묻어있는 경우가 많다. 아이가 자랐어도 버려지지 않고 재사용 돼 순환하는 것이다. 요즘은 유모차의 기능을 살린 유모차 아닌 유모차도 나오고 있다. 유모차처럼 네 개의 바퀴에, 물건을 담을 수 있는 통이 달린 작아진 수레 같은 것 말이다. 유모차보다 아담하고 세련된 모양이라 도시의 노인들이 주로 이용하는지, 집 근처에서 가끔씩 볼 수 있다. 하지만 실버카로 불리는 이 유모차 아닌 유모차는 실제 아이를 태우고 다니던 낡은 유모차에 비해 정감이 덜 가는 편이다. 유모차엔 할머니와 손자를 이어주는 뭔가 교감이랄까 인정이랄까 그런 게 느껴지는데, 이런 유사 유모차는 마치 링거액을 거는 거치대나 끝에 네 개의 다리가 달린 지팡이처럼, 노인들의 편의나 보행을 돕기 위한 기능만이 도드라진 것 같기 때문이다.
 김명리 시인은 '텅 빈 유모차'라는 시에서 한낮에 유모차를 밀고 가는 할머니를 "가네, 댓바람에 휩쓸린 멧새 울음 속/ 내 어머니의 어머니의/ 살아생전이 가네/ 세월의 삽날에 허리 꺾인/ 바퀴살이 아직은 쓸 만한 유모차가 가네"라고 묘사했다. 어머니의 어머니의 살아생전은 이제 자녀의 자녀에게 의탁된다. 아이 울음소리가 끊긴 시골에서 손자의 손을 잡고 돌아가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기는 어렵다. 할머니는 손자의 손대신 유모차의 손잡이를 잡는다. 멀리 떨어진 조손은 유모차를 통해 서로 손을 잡는다. 그리고 생은 유모차 바퀴살처럼 굴러서 누구든지 언젠간 저 둥근 석양을 맞게 되리라는 진실을 일깨워준다.
 나는 애초에 유모차를 사지 않고 물려받아 썼다. 두 살 터울 아이들을 그 유모차로 키우다보니 나중엔 바퀴가 고장이 나 못쓰게 됐다. 늦둥이 셋째는 다른 유모차를 물려받았다. 두어 살 되도록 쓰고도 멀쩡해서 재활용 코너에 세워두었더니 이내 누군가 가져갔다. 한 동짜리 작은 아파트에서 그 유모차가 눈에 띄지 않는 것을 보니 아마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드리려고 가져간 것일 수도 있겠다. 내 아이가 쓰던 유모차를 밀며 시골길을 걸어가는 할머니를 생각해본다. 푸성귀와 흙 묻은 호미와 씨앗봉지와 햇살이 한가득 담겨있는 유모차를. 그 유모차를 밀고 가는 주름진 손과 굽은 허리를. 흐려진 눈이 아득히 가닿는 들판의 끝을. 김명리 시인은 아까 그 시에서 "젖먹이 울음소리 텅 빈 유모차들도/ 상한 풀잎을 지상으로 떠받치는/ 저토록 단단한 힘이 되네"라고 했다. 그처럼, 아이들은 빠르게 자라 유모차를 떠나고, 노인들은 그 힘에 의지해서 천천히 대지를 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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