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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노키오 극단 대표

"여보!  이 뱃속에 아이만 없었어도 저를 다시 데려 가려고 왔지요? 그렇죠? 이 아이만 없었어도!"

 지난주 막을 내린 공연 제작소 마당의 연극 '작은 할머니'(허은녕 분)가 무대 위에서 오열하며 외치는 대사다. 이 연극은 질곡 많았던 한국의 근현대사를 지내온 우리 할머니 시대의 이야기다. 일제 치하와 기근, 전쟁, 피난이라는 비극적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희생양이 된 파란많은 여인들의 삶을 가정사로 그려 내고 있다.

 연극은 곧 시집을 가는 손녀딸(김새봄 분)에게 작은 할머니로 살아야만했던 과거사를 들려 주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본남편이 독립운동을 하기위해 집을 떠나게 되자 가난과 일본 경찰의 강간 위협을 견디지 못해 씨받이 소실로 팔려 가게 되면서 주인공의 기구한 일생이 펼쳐진다. 소실로 간 댁의 큰댁(하다효지 분)은 사내아이를 낳지 못하는 자괴감에 남편(황병윤 분)에게 짓눌린 일상을 산다. 입덧을 하기 시작한 작은댁과는 서로 질투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 사이지만 자매처럼 위하는 모습이 오히려 가슴 뭉클하다.

 반면에 두 여인을 거느리며 군림하는 남편은 다소 해학적으로 그려내 흥미롭다. 고선평 연출자는 이를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재조명하고 있다. 남아선호 사상이라든가 권위적·가부장적인 시대 흐름 위에서 여성들의 억압된 삶에 대한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반증으로 남편의 성격 구축을 풍자적으로 그려냈다. 세월이 흘러 노망들어 누워있는 가운데서도 작은댁을 못살게 구는 남편 앞에서 방귀를 끼는 장면과 첩살이 종살이로 살아온 지난 세월을 덩실덩실 춤 추며 한풀이하는 장면들은 그래서 더 호소력있게 다가왔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큰댁은 피난길에 아들 먹일 양식을 구하기 위해 미군부대를 서성이다가 미군에게 윤간당하고 자살하고 마는 비극적 장면은 우리네 여성들이 피해자로 살아왔던 지난날을 되돌아 보게 했다. 둘째 아이까지 가지게 된 작은댁은 독립운동을 하다 환자로 돌아 온 본남편이 미안한 마음에 아내를 위해 마지막까지 간직해 뒀던 땅문서를 전해 주며 초라하게 떠나는 뒷모습을 향해 "여보! 이 뱃속에 아이만 없었어도 저를 다시 데려 가려고 왔지요? 그렇죠? 이 아이만 없었어도!"라며 오열하는 장면에서는 객석을 눈물로 적시게 하고 말았다.

 가정사는 시대상을 반영하는 거울과도 같다. 그래서 한 가정사는 당시대의 흐름과 같은 선상에 있는 것이다. 후세대는 당시대를 살아온 어른들의 아픔을 잘 이해 못하지만 재조명해 보려는 노력은 한다. 그래서 소실에게서 난 첫째 아들 진범은 장성한 후 그동안 호적에도 올리지 못한채 살아온 어머니의 이름을 올리겠다며 부모 세대에 대한 연민을 전한다. 한편 본남편과의 슬하에 태어나 아버지 품에서 자란 외동딸 조춘이(김규리 분)는 긴 세월 지나 어머니를 찾아 온다. 시집을 가게 됐으니 결혼식장에 함께 해 달라는 소식을 들은 어머니 자신은 딸의 결혼식에 참석할 자격이 없다며 거절한다. 하지만 지난 세월 딸 역시 피해자로 살아 왔음을 원망의 눈물로 쏟아내는 딸을 보며 서로 부등켜 안은채 화해를 이룬다.

 다소 무거워 보이는 소재이며 복잡해 보이는 관계 구성을 인물 마다의 성격 구축을 잘 이끌어 낸 섬세한 연출 구성으로 깔끔하게 마무리한 작품이었다. 그리고 소소한 일상들이 모여 전체 이야기를 구성하듯 귀분댁(김영희 분)과 서산댁(박정영 분)의 감칠맛 나는 연기력이 장면 사이를 웃음으로 채웠다. 울산 연극계에 출중한 연기력을 가진 중견 배우들이 늘고 있다는 것이 여간 반갑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배우란 오래 묵은 세월과 함께 할 때 더 빛을 발하는 직업이다.

 질곡 많고 녹록치 않았던 현실의 세월을 우리보다 먼저 사신 어른들은 가끔 이렇게 이야기 하신다. "내 살아왔던 가슴 속에 묻어둔 지난 이야기 들어 보면 소설책 한 권은 될 것이다" 라고. 지금 시대에는 남존여비나 남아선호 사상이 사라진지 오래다. 남녀 평등을 넘어 여성불편신고센터가 운영되고 있을만큼 여성 인권이 더 우위인 시대다. 당연하다. 가정에서든 나라에서든 여성이 건강하고 행복해야 가정과 나라가 산다.

    그래서 여성은 가정과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향기를 발하는 꽃이며 아름다운 정원과도 같은 것이다. 남편이 호통치면 대청마루부터 찾아 숨었다는 작은 할머니가 시집을 앞둔 손녀에게 들려 주는 말은 가슴 아팠다. 그리고 "너희는 그러지 말아라. 아내나 남편이 대청마루로 숨어 들게 하지 말아라"라는 마지막 대사가 피해자도 가해자도 되지 말고 서로 사랑하라는 메시지로 다가와 늦여름밤 별처럼 가슴깊이 박혀 왔다.

 유난히 무더웠던 여름이 떠나가고 어느새 결실의 계절인 가을의 문턱이다. 천고마비의 계절이며 아름다운 하늘을 볼 수 있는 가을에도 내 고향 울산에서 활기차게 펼쳐질 문화 예술 공연들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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