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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논설위원

거짓말처럼 꼬리를 내린 폭염의 그림자 뒤로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참으로 질긴 무더위였다. 계절의 순환이 이처럼 반가운 적이 있었을까. 대한민국이 참 괜찮은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계절의 뒤바뀜 없이 열대야가 지속됐다면 한반도는 지옥이 아니겠는가. 혹독한 여름도 살을 에는 겨울도 때가 되면 물러간다는 것, 이런 자연은 축복임에 틀림없다.

 1년 내내 무더위가 계속된다면 우리나라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그 예고편을 보여준 지난 여름이었다. 온도가 내려가지 않는 열대야에 에어컨을 틀지 않고는 살 수 없었다. 생태계도 이상 징후를 보였다. 사막처럼 작열하는 태양에 농작물은 타들어 갔다. 전국의 강, 하천, 호수, 바다는 녹조라떼로 뒤덮였다. 식수 비상에 가축·양식 어류가 떼죽음했다. 콜레라가 발생하고 집단식중독이 줄을 이었다. 더위에 강한 말벌떼가 전국 도처에서 기승을 부렸다. 수많은 노약자가 온열질환으로 숨졌다.

 건강한 사람들도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체력이 떨어지면 정신도 몽롱해진다. 일에 생산성이 붙을 리 없었다. 휴식을 위해 사람들은 시원한 곳을 찾아 대피해야 했다. 올여름 영화관이 미어터진 건 명작이 있어서가 아니라 더위 덕택이다.

 기상청에 의하면 8월(1~25일) 서울의 평균 최고기온은 34.34도로 100년 이래 최악의 폭염을 기록했다. 예년에 비해 3도 이상 높았다. 변덕스런 날씨를 예측하지 못한 기상청은 동네북이었다. 이런 상황이 상시화한다면 재앙이 되리라는 건 불 보듯 뻔하다. 작년 12월 세계 지도자들은 파리에 모여 2100년까지 지구 온도 평균 상승 폭을 섭씨 1.5도 이하로 억제하기로 협정을 맺었지만 채 1년도 안 돼 불가능한 것으로 결론 났다. 전 세계가 화석연료를 일절 사용하지 않아야 달성 가능하다니 파리협정이 무의미해졌다.

 매사추세츠대 연구진이 지난 3월 과학저널 네이처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지구 온난화가 지금과 같은 속도로 진전될 경우 극지방의 빙하가 녹으면서 금세기 말에는 해수면이 2m 정도 상승해 세계 곳곳의 저지대 해안도시가 침수될 것으로 예상됐다. 다른 연구들은 기상이변에 따른 가뭄과 홍수, 사막화, 생태계의 변화 등으로 인류의 생존환경이 크게 악화할 것으로 내다봤다. 우리가 경험한 끔찍한 여름을 열대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나날의 삶으로 헤쳐가야 한다. 생활이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문화인류학자이자 문명연구가인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나와 세계'에서 '왜 어떤 국가는 부유하고 어떤 국가는 가난한가'를 분석했다. 그는 국가의 부(富)를 가르는 요인으로 지리적 요인과 제도적 요인을 꼽고 지리적 요인 가운데 핵심적인 것으로 위도를 지목했다. 대체로 온대지역 국가들이 열대지역 국가들보다 부유하다는 것이다.

 다이아몬드는 그 이유로 열대국가의 낮은 농업생산성과 열악한 공중보건을 들었다. 열대지역은 사계절 따뜻하고 많은 비가 내리기 때문에 농업여건이 좋아 당연히 생산량이 온대지역에 비해 많아야 하지만 실상은 정반대다.

 열대지역은 빙하기를 겪지 않아 토질에 영양분이 없고, 그나마 자주 내리는 비 때문에 유기물이 강이나 바다로 쉽게 씻기거나 높은 온도로 인해 분해속도가 빨라 비옥도가 낮다. 겨울의 살균 기간이 없어 병원균과 벌레, 곰팡이가 창궐하는 것도 농업에 치명적이다.

 열악한 공중보건 환경도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각종 질병을 일으키는 벌레, 곤충, 세균, 기생충 등으로 질병이 빈발하면서 아프리카 잠비아의 기대수명은 41세에 불과하다. 이는 기대수명이 80세인 한국과 비교할 때 인구 경제활동에서 비교할 수 없는 차이가 난다.

 그러니까 사계절이 구분되고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는 그 자체로 약속의 땅이나 다름없다. 시골 벽지에서 자란 어린 시절 어른들이 '삼천리 금수강산(錦繡江山)' 어쩌고 하면, 평야는 드물고 보이는 거라곤 산과 하늘밖에 없는 찌질한 나라가 무슨 금수강산이냐고 속으로 어깃장을 놨는데 올여름을 겪고 보니 그게 아닌것이다. 여기에 지하자원이 많은 국가는 가난하거나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는 '자원부국의 패러독스'까지 곁들이고 보면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대한민국을 하늘이 외면한 땅이라고 비관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북한은 왜 저리 가난한가. 제도적 문제다. 1인 세습 독재, 폐쇄 경제는 적도급 기후만큼이나 가난의 지름길이다. 부국이 될 수 있는 좋은 위도를 타고났는데도 최악의 제도와 통치자를 만난 결과다.  선선한 계절을 맞았으니 연초부터 계속된 나라 안팎의 열불나는 일들은 잠시 잊고 다들 여유를 좀 가졌으면 싶다.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의 아수라에서 눈을 돌려 청명한 하늘과 숲으로 안구 세척을 해보자. 기후변화로 한반도가 미래에 아열대가 될지 열대가 될지 알 수 없으나 오늘 현재 365일 푹푹 쪄대는 열대지역이 아니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사하고 복 받은 땅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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