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인

올해 초인가 텔레비전을 보던 중 내 귀를 번쩍 치며 들어앉은 말이 하나 있다. '꼬집'이란 말이다. 처음 이 말을 듣고 무릎을 쳤다. 음식을 하면서 가장 막연했던 '적당'이란 값을 이렇게 절묘하게 조어했구나 싶어서였다. 맛내기에서 양념의 최소 단위가 '적당'에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몇 십 년은 흘러왔을 것인데, 이렇게 반짝 하고 세상에 나와 인사를 하니 반갑기 짝이 없다.

 가족의 식사를 책임져야 하는 입장이 돼 처음 어설프게 반찬을 만들면서 '적당'이라는 양의 막연함이 얼마나 난감한 일이었는지 기억난다. 물론 막막하고 지극히 주관적인 이 '적당'이란 양도 얼마간의 경험을 통한 뒤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 당연한 듯 쉬운 이 '적당'이 처음 접하는 이에게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나는 충분히 겪었다. 이런 내게 '꼬집'은 반가운 충격으로 다가왔다.

 '꼬집'이란 말은 '꼬집다'라는 동사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다섯 손가락 중 엄지와 검지 두 손가락이 꼬집는 기능이 가능한 것이니, 무언가를 조금 집어 올릴 때 두 손가락으로 꼬집듯이 집으니, 편하게 빌어 와 썼을 것이라 유추해본다.

 원칙주의자들은 하나의 용어를 명사화시키기 위해서는 접미사 '-이'나 '-개'나 '-보 '를 하나쯤 붙여서 완성했을 것이다. 조어 원칙을 고수하려 '꼬집'보다는 '꼬집이' '꼬집개' 정도로 주장했겠지만, 참으로 대담하게 '꼬집'으로 귀결 지어졌다.

 누구의 발상인지 모르지만 기발하다. 궁즉통이라 했던가. 어쩌면 현장에서 몇 십 년 궁한 끝에 자연스레 태어난 말인지도 모른다. 저간의 경위는 알 수 없으나 원칙과 법칙은 다 깨버리고 '꼬집' 어간만으로 하나의 단어를 완성시켰으니 오히려 신선하다. 하나의 언어가 창조되어 새로운 의미를 갖는 것을 바라보는 일은 참 즐겁다. 더구나 절실한 사람들이 절실한 필요에 의해 탄생했을 것이라 본다면 참으로 실용적인 단어임에 틀림없다.

 '꼬집'이란 말은 실용성 외에도 발음하기도 듣기도 좋은 예쁜 말이다. 맛을 나타내는 단어라 그런가 우선 입에 착 감긴다. 소위 언어의 미학이 여기에도 해당된다. 시어나 아름다운 문장에만 미학적인 요소가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소리까지 예쁜 '꼬집'이라는 독자적 단어 하나가 나는 그저 신통하고 반갑다.

 맛의 개미는 서양에서부터 건너온 크고 작은 수저의 양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바로 이 한 '꼬집'에서 오는 것이다. 음식의 완성 단계에 이르러 이 한 두 꼬집의 간 맞춤은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신의 한 수가 될 수 있다. 개미의 그늘을 치는 맛은 한 두 해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들도 몰라요, 며느리도 몰라요 하는 광고 카피가 떠오른다. 한 가정의 맛이 전수되는 비법은 바로 이 적은 한 꼬집에서 좌우되는 것이다.

 꼬집의 사용처는 어디 맛뿐이랴. 우선 내게선 한 꼬집의 아집과 한 꼬집의 게으름과 한 꼬집의 식탐을 버릴 수 있다면 조금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을 것이고, 한 꼬집의 열정과 한 꼬집의 사랑과 한 꼬집의 창작력이 더 있었다면 제법 맛깔나는 내가 되었을 것 같다.

 사회에선 한 꼬집의 이해와 한 꼬집의 용서와 한 꼬집의 양보가 더 있어준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부드러운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나나 가정이나 국가나 전 세계가 살아가는 맛의 묘미는 국자나 숟가락으로 해결될 양이 아니고, 아주 적은 양 한 '꼬집'이 완성시키는 것이다. 많으면 욕심일 것이고 너무 적으면 아쉬울 것이고, 그 중간에서 모두의 입맛을 해결한 이 한 '꼬집'이란 단어의 탄생을 진실로 환영한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