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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숙 시인

신문에서 반가운 기사를 봤다. 전 연세대 철학과 김형석 교수께서 향년 96세로, 아직도 건강하게 집필 활동을 하고 계시다는 소식이다.  김형석 교수는 김태길, 안병욱 교수와 함께 1세대 철학자 3인방이라 불리던 분이시다. 세 분은 수필로도 유명한데, 지금의 5, 60대는 젊은 시절, 이분들의 수필을 읽으며 삶에 대해 고민하고 숙고하곤 했던 것이다. 김태길 교수의 '글을 쓴다는 것' '어떻게 살 것인가', 안병욱 교수의 '끝없는 만남' 등은 당시 국어교과서에도 실렸던 유명한 수필들이다. 나는 삼중당에서 문고판으로 출간된 '영원과 사랑의 대화' '고독이라는 병' 등을 읽으며 김형석 교수를 알게 됐다. 그리고 작은 인연을 맺게 되는데, 물론 그 인연이라는 것이 '나는 오바마를 안다(하지만 오바마는 나를 모른다.)'처럼 내 쪽의 일방통행인 셈이지만, 아무튼 그 사연은 다음과 같다.

 고등학교 때, 몽상가적 기질이 있는 몇 친구들이 모여 철학적인 주제로 토론을 해보자는 명목으로 '소피스트'란 모임을 만든 적이 있다. 우리는 학교 앞 분식집에서 첫 모임을 가졌는데,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문득, '돌과 아이스크림은 같다'라는 명제를 논리적으로 증명하기에 골몰하게 되었다. 돌은 단단하다. 아이스크림도 얼리면 단단하다. 그러므로 돌은 아이스크림이다? 분자 단위로 잘게 나누면 돌과 아이스크림의 구성 성분은 같을 것이다. 그러니 아이스크림은 돌이다? 우리는 삼단논법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명제를 가지고 소피스트처럼 궤변을 늘어놓았다. 이런 모임이 오래 갈 리가 없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모임의 목적은 시나브로 잊어버리고 떡볶이와 튀김을 먹고 수다를 떠는 데 열을 올리게 되었다.

 어느 날 누군가, 재료와 시간과 불의 강도와 같은 외부 조건이 완벽히 동일하다면 만드는 사람에 따라 음식의 맛이 달라질까 그렇지 않을까하며 의문을 표했고, 우리는 오랜만에 '소피스트'라는 모임의 목적을 생각해내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쉬이 결론이 나지 않았다. 마침 그때 김형석 교수의 수필집을 읽고 있던 내가 교수님께 편지를 써서 자문을 구해보자고 건의를 했다. 그리고 건의를 한 내가 편지를 쓰기로 했다. 큰 기대를 하진 않았는데, 교수님께선 손수 답장을 보내주셨다. 답장에는 음식은 손맛이라는 게 있다면서, 아무리 외부 조건이 같다고 하더라도 정성이나 손맛에 따라 맛이 달라질 것이라는 견해가 쓰여 있었다. 우리는 알지도 못하는 고등학생의 편지에 직접 답장을 해주시는 교수님께 감동을 하고 더더욱 에세이 읽기에 열을 올렸다.

 몇 달 뒤에 교수님께 순수한 이미지가 드러나는 이름을 하나 지어 주십사고 편지를 드렸는데, 이번에도 교수님은 '깔뚝이'란 이름을 적어 보내셨다. 그 뒤 몇 차례 더 이어진 이런 저런 질문에 귀찮은 내색 없이 장문의 답장을 보내주시고 어쭙잖은 원고에 조언도 해주셨는데, 삼학년이 돼 입시 준비로 바빠지며 이 모든 것은 우선  순위에서 밀리며 잊히게 됐다.

 그런데 96세라니, 지금의 내 나이가 당시 교수님의 연세쯤 되는 셈이다. 그때 교수님은 벌써 여러 권의 저서를 내고 많은 독자들에게 읽히고 있었는데, 지금의 나를 생각하니 부끄러울 따름이다. 그리고 이젠 손 편지 커녕 전자메일도 답장을 미루다가 나중엔 답장을 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일일이 손으로 답장을 써주시는 게 얼마나 정성이 필요한 일인지 새삼 느낀다. 교수님은 삶의 태도에 대해 글에 쓰신 그대로 실천하신 셈이다. 사실 그때 읽은 교수님의 책의 내용도, 왜 그 책을 좋아했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거의 유일하게 기억나는 내용이라면, 어떤 사람이 뛰어가는데 누군가 왜 그리 열심히 뛰어가냐고 묻는 장면이다. "학교에 늦을까봐 뛰어갑니다" "학교엔 왜 다니는가?"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해서입니다" "좋은 직업을 가져 뭐하려는가?"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룰 겁니다"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룬 다음엔?" "열심히 살아야죠" "그 다음엔?" "뭐, 나중엔 죽겠지요" "여보게, 그럼 자네는 죽기 위해 그리 열심히 뛰어가는 건가?" 정확하진 않지만 대략 이런 내용이다. 사색과 성찰의 중요성을 강조한 예다. 지금은 대화에 논리의 비약이 보이고 살아가는 매 순간이 소중하다고 생각하지만, 고등학교 때는 이런 글을 읽음으로써 삶의 목적이나 살아가는 자세 등에 대해 나름대로 고민하고 답을 찾기 위해 애를 썼던 것이다.

 삶과 죽음, 사랑, 행복과 같은 철학적 주제를 쉽고도 유려한 필체로 펼쳐 보여 우리에게 사색의 시간을 갖게 하시고, 무명의 지방 학생에게도 일일이 자필 편지를 정성껏 보내며 격려해주셨던 교수님. 최근 교수님은 '백년을 살고 보면'이란 책을 내셨다고 한다. 백년을 살고 보니, 65세에서 75세 사이가 인생의 황금기라고 말씀하신다. 나한테도 아직 기회가 있는 셈이다. 갑자기 기운이 솟는다. 교수님. 깔뚝이가 인사드립니다. 오래오래 건강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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