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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이 지나도록 병원에 오지 않고 약도 복용하지 않고 잘 지내던 환자인데 이번 지진 때문에 다시 진료실을 방문하게 되었다. 처음 발병할 때처럼 증상이 심한 것은 아니지만 어지럽고 미식거리며 마음이 불안한 증상으로 다시 오셨다. 불안 증상이 다시 재발한 것도 힘든 것이지만 그 환자분은 지진이 왔을 때 불안해하는 자신의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이기 싫은데 그것이 안 되는 것이 더 힘들었다고 한다.

 사실 불안도 문제이지만 불안해하는 자신이 의식되는 것 또한 불안한 것이고, 그 불안이 자신의 의지로 어쩔 수 없는 '자율적'인 점이 자신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다. 지진이 일어났고 그래서 건물이 흔들렸다. 그것에 대하여 그저 흔들렸네 하고 받아들였다면 문제가 없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 환자의 경우는 그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예전 불안에 대한 기억도 같이 '흔들어 놓았을'수 있고 그렇게 흔들린 '마음'을 의식하게 되었고 또한 그것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싫은 자신의 마음도 같이 따라서 흔들렸다. 지진에서 피할 수 없지만 오히려 지진이 왔을 때 흔들리는 이 마음으로부터는 더 피하기가 힘든 것이다. 땅이 흔들렸지만 마음은 더 흔들렸다고 할까?

 그러나 땅이 흔들리지 않는다고 우리가 불안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철학자 하이데거는 불안을 우리의 기본적인 기분의 '조율성'으로써 우리 인간의 존재를 개현하게 하는 탁월한 감정으로 본다. 물론 병적인 불안은 있는 것이지만 근본적 불안이란 우리가 염려하는 우리 세계와 그 세계와의 관계를 드러나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런 기본적 기분은 우리가 흔히 감정(emotion)이라고 이름 하는 것과는 역할이 다른 것으로 본다. 두려움 같은 감정은 예컨대 뱀에 대한 두려움처럼 하나의 대상으로 향하지만 불안 같은 기본적 기분은 그런 하나의 실체로 향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런 것을 포함한 세계로 향한 불안이다. 그래서 '대상 없는' 두려움을 불안이라고 한다. 지진에 대한 불안은 물론 지진이라는 대상에 대한 공포이지만 좀 더 광범위하다. 그리고 바닥을 흔들어놓는다고 할까 좀 더 전체적 불안이고 개인적 경험이기보다는 집단적이다.

 이번 지진으로 울산의 여러 정신의학과 진료실과 정신건강증진센터의 상담실에는 지진으로 인한 불안으로 방문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울산중구정신건강증진센터와 울산중구중독관리센터는 같이 만나는 회의에서 지진으로 불안해하는 분들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 논의하였다. 그 중 하나는 기존에 시행하고 있는 요가명상을 그분들에게 소개하는 방안도 포함된다.
 사실 명상이란 한 가지 방법이 아니고 다양한 종류가 있으므로 환자분마다 자신이 원하는 방법을 선택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게 선택된 명상이란 '직접적'으로 자신의 마음에서 행하는 것이고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으며, 제대로 수행되면 약과는 달리 부작용이 없다는 것 등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명상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불교도 그렇고 동양의 도(道) 사상도 다 명상을 '방법론'으로 가지고 있다.

 달마 대사의 제자 혜가는 자신의 '불안한' 마음을 견딜 수 없어 달마대사를 찾아갔다고 한다. "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십시오."라고 간청을 하였을 때 달마대사가 대답한 것은 "너의 마음을 가져오너라. 그럼 내가 편안하게 해주리다."였다. 이 말을 듣고 깨달았다. 아무리 찾아봐도 마음 간 곳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고는 마음이 편안해 졌다고 하며 후세에 이 내용의 법문을 안심법문이라고 한다.
 정신과에서도 여러 명상들을 치료에 이용한다. 간단히 근육을 이완하는 단순한 이완요법으로부터 요가명상 그리고 불교적인 명상에서 응용된 온마음챙김(mindfullness) 명상도 있다. 그리고 융의 적극적 상상(Active Imagination)도 명상이다.
 그리고 불안에 대한 해석에서 그 감정의 조율로부터 존재가 드러나는 것임을 이야기하는 하이데거의 방법이나 후설의 '판단중지'도 명상의 한 형태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자의적 판단에 의한 정서적 왜곡으로부터 순수한 본래 자기 모습을 찾고자하는 것으로 끊이지 않는 '잡념'의 성질을 가진 판단을 중지할 수 있는 것이다.

 불안을 어떻게 대처하느냐는 사실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 근본적인 문제가 아닌가. 우리의 '실존'은 사실 죽음에 대한 끊이지 않는 '안심'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불안의 용기'가 피어오르게 놔두지 않는다고 한다.
 이 말을 들으면 필자는 오래전에 본 영화 '공동경비구역'에서 송강호 배우가 하던 말이 생각난다. "총을 얼마나 빨리 뽑을 수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얼마나 "침착할 수" 있느냐이다. 사실 지진이 나서 만약 건물이 무너질 때도 그곳에서 빨리 나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당황하지 않는 것'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불안이 아니다. 불안에 대하여 그것을 쳐다보고 있을 수 있는 '불안의 용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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